장원도 (부산 향우)
장원도 (부산 향우)

남해 임진성은 언제부터인가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거의 두 달 동안 계속되어 온 장마가 끝나는 날 친구가 운전을 해준 덕분으로 편하게 임진성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방문을 환영하는 듯이 하늘은 맑게 개어있었다. 

남면 상가마을 쪽으로 가는 큰길에서 벗어나 300미터쯤 되는 고개를 올라가니 바로 앞에 임진성이 나타났다. 돌로 쌓은 아담한 성으로 정감 있는 모습이었다. 먼저 정지 장군의 공덕비가 눈에 들어왔다. 정지 장군이라면 고려 말 관음포에서 왜구를 물리친 분인데 왜 여기에 있지 라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일어났다. 그러다가 왜구가 남해 전체에 출몰해서 한때 남해가 무인 섬이 되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더욱이 이쪽은 해안가여서 왜구의 폐해가 한층 더 심했을 것이다. 
바로 옆이 임진성으로 들어가는 문인 동문이다. 문 양쪽으로는 돌을 쌓아 올려 석벽을 만들고 있다. 문은 아무런 장식 없이 출입구만 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문 안으로 들어서니 소나무 몇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이 소나무들이 그 옛날 성을 지키는 병사들의 화신으로 보인다. 일단 남쪽으로 성벽 위를 걷는다. 돌을 편편하게 쌓아 놓아서 산 아래 마을과 들을 내려다보며 산보라도 하는 기분이다. 남쪽으로는 남해의 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섬도 보이고 바다 건너 여수 땅도 보인다. 
안쪽으로는 성벽을 따라서 수로가 놓여있다. 산허리를 돌아서 성을 쌓았기 때문에 성 안쪽이 약간 비스듬하게 올라가고 있다. 여기저기에 모시풀이 자라고 있다. 그 옛날 성안에서 모시를 재배해서 사람들의 옷감을 마련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위로 바위와 나무들이 보일 뿐 어떤 인공물도 없다. 

발굴조사단에 의하면 임진성의 기단은 통일신라 시대의 축조기법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성내에는 성벽을 따라 성을 방어하기 위한 석환(몽돌)이 발견되고 있다. 또한 도처에 집터가 있고 자기와 기와 파편이 산재하고 있으며 화전과 패총도 나타난다고 한다. 당시 성안에는 성루와 망대 서당까지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물터도 있는 것으로 보아 성안에서 상당한 기간 동안 생활하는 것이 가능했으리라고 여겨진다. 원래는 흙으로 만든 외성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다. 지금 보이는 것은 내성으로 둘레는 300미터 정도이고 타원형이다. 높이는 본래 6미터에 이르렀다고 하나 지금은 1미터에서 6미터 정도이다. 예전에는 이 위에 여장을 만들어 총구를 내고 다시 그 위로 2미터 정도 쌓아 올렸다고 한다. 지형지세를 이용해서 쌓았기에 성문만 막았다면 밑에서 올라오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을까. 

이곳 평산리 일대는 신라 경덕왕 때부터 평산현으로 불리었으며 난포현과 더불어 남해군의 속현 역할을 했다. 왜구의 잦은 침입에 대비하여 평산포진성을 쌓았으며 고려와 조선시대에서도 계속 수축했다고 한다. 임진성도 최초에 쌓을 때는 평산포진성과 연계해서 만든 것은 아닐까. 
임진성은 임진년인 1592년에 왜군의 침략에 대비해서 쌓았기 때문에 말 그대로 ‘임진성’이라고 부른다. 이 성은 임진왜란 때 왜군을 막기 위해 군 · 관 · 민이 힘을 합쳐 쌓았기에 ‘민보산성(民堡山城)’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고현면 한실마을에서 내려온 이야기에 의하면 임진성은 한실마을 장씨 집안사람들이 머슴을 대동하고 며칠 만에 쌓았다는 것이다. 남면 덕월리에 살면서 임진성을 관리했다는 잔다리(다리를 저는) 영감도 이 사실을 전해 들어서 알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성과 장씨 집안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안동장씨 족보에 의하면 21세손 장응삼(張應參)은 임진왜란 때 박지실(朴智實), 변연수(卞延壽) 등과 같이 의병을 일으켜 이순신 장군을 따라 1598년 노랑 관음포 전투에서 공덕을 쌓아 어모장군(禦侮將軍)의 칭호를 받은 것으로 되어있다. 장응삼의 비문에도 같은 내용이 적혀있다고 한다. 그래서 두 분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았는데 박지실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고 변연수는 진주 사람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변립(卞岦)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웠다. 거제 옥포해전에 참전하여 왜선을 격파하고 수많은 왜적을 사살하는 큰 공을 세웠다. 이어서 당포해전에도 참전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전사하였다고 되어 있다. 

예전에 임진성과 평산포진성 사이의 작은 포구를 옥포로 불렀다. 이순신 장군이 최초로 승리를 거둔 옥포와 남해 옥포의 지명이 동일하므로 왜군이 옥포로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퍼지자 남해에서는 이곳으로 쳐들어오는 줄 알고 불안해했다. 당시 23세의 혈기방장한 장응삼은 옥포해전에 참가했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앞장서서 왜적을 막으려 달려왔을 것이다. 
임란 후 300여 년이 지났는데도 이러한 이야기가 전해오는 것은 장응삼과 장씨 집안 사람들이 임진성을 쌓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아닐까. 

바다 쪽 외에는 빙 둘러 높은 산들이 임진성을 에워싸고 있다. 임진성 바로 아래에는 들과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비전문가인 필자의 눈에도 군사적으로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천혜의 명당자리로 보인다. 평산포 쪽에서 적군이 나타나면 결전 준비를 서두르고 설흘산 봉수대로 신호를 보냈을 것이다. 

성을 따라 한 바퀴 돌아 성문을 나오면서 성을 쌓고 지키려고 애쓰신 우리 선조들께 잠시 묵념을 드렸다. 돌 하나하나에 선조들의 애환이 서려 있을 것이다. 애써 만든 임진성을 소중하게 보존하고 적의 침략에 우리 자신을 스스로 지켜가는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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