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가 기승을 부립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느낄 수 없었던 더위입니다. 얼마나 더운지 한낮에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땀이 비 오듯 합니다. 심지어는 이른 아침 일지라도 조그만 걸어도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정도이니 확실히 예전과는 다른 더위입니다. 

이러한 더위를 보면 우리나라도 머지않아 열대 나라로 가는 게 아니냐는 우려 섞인 이야기가 나올 정도입니다. 보통 이처럼 더운 날씨일 때면 대개 바다나 산으로 피서를 떠나기도 합니다만 필자는 마을 앞 들길을 택하여 심신을 달랩니다. 

들길이라 하지만 동네 앞을 가로지르는 농로(農路)입니다. 비록 나무 한 그루 없는 들길이지만 양방향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더위를 쫓기에 안성맞춤입니다. 
여기에다 조용히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명상하는 여유로움도 있습니다. 농로는 그야말로 더위를 쫓을 최적의 장소이지만 필자가 이 길을 택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농로 한가운데에서 자생하는 야생화를 볼 수 있다는 기쁨입니다. 

길게 뻗어있는 농로 한 컷에 다소곳이 자리 잡고 어느 꽃 못지않게 고운 자태를 뽐내는 야생화의 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살갑게 다가옵니다. 마치 저희는 사람의 사랑을 받지 않아도 하늘과 땅이 엮어주는 순수한 사랑이 있기에 조금도 부럽지 않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말입니다.

흔히 집 안에서 자라는 화초는 애지중지 보살피는 주인의 사랑이라도 받지만 야생화는 이런 사랑조차 받지 못함에도 전혀 기죽지 않습니다. 
갖가지 모양으로 자란 야생화는 형형색색의 아름다움을 뽐내며 오가는 사람의 시선을 이끕니다. 
이를 보는 사람들은 어쩜 이렇게 곱고 아름답게 꽃을 피워낼 수 있을까? 이 꽃 속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기에 이리도 사람의 시선을 이끌게 하는가 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세상만사 모든 일이 근본을 놓치면 그 실체를 알 수 없듯이 야생화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들의 본질은 무엇이며 안팎으로 생성되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의 덕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아가는지를 탐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이처럼 예쁜 꽃이 피는 비결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채우고 비워내며 움츠리고 뻗어 나가는 움직임인들 그들이라 해서 도외시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땅 위의 모든 생명이 내쉬는 호흡은 서로가 큰 한숨으로 공유하며 전체의 기운을 새롭게 하는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할들에 힘입어 우리 역시 육신을 정화할 치유의 양식을 축적할 수 있기에 그들의 삶과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을 향한 연민의 정이 높아만 가는데 그 느낌을 알아차렸는지 야생화는 오히려 이렇게 반문합니다. “왜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에만 관심을 두는가요. 왜 우리들의 속 깊은 이야기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채 꽃이 핀 것에만 관심을 두느냐”고 말입니다. 

하나의 과정은 전체와 연결되어 있듯이 각각의 역할이 이어져 마침내 꽃이 피는 것을 보면 그 하나하나가 얼마나 순수하고 아름답습니까? 그 하나의 역할이 모여 전체를 아름답게 할 이 순수의 미학에 공감할 즈음 “사실 우리는 꽃봉우리가 나올 때까지, 아니 꽃이 필 때까지 얼마나 외로웠는지 모릅니다. 고독하기도 하고요. 특히 이 길을 지나는 자동차나 트럭의 기계음에 깜짝 놀랄 때도 있습니다, 또한 거센 비바람을 동반한 태풍이 몰아칠 때면 흔들리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불안에 젖어 들기도 하였고 각종 오염원이나 질환으로 신음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러한 고충 속에서도 가뭄이 도래할 때면 한 모금의 물이라도 나누어 마시며 우의를 돈독히 하기도 합니다. 

사시사철 때때로 다가오는 풍우 상설(風雨霜雪)을 견디면서도 단 한마디 불평의 기색을 보인 적도 없고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꽃만 찾을 뿐이고 지난한 세월을 거쳐 오는 동안 이렇듯 고된 삶의 여정에는 그리 관심을 두지 않는다”라며 안타까움을 호소합니다. 이들과 대화하는 사이 넓적한 잎을 뽐내는 야생화의 기품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옵니다. 그것은 어떤 위기가 닥쳐도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면서 단 한 치라도 그 질서에 거역하지 않는 순수의 모습 그대로 말입니다. 

시인 김춘수 님은 그의 시 ‘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 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것처럼 기분 좋은 일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매 순간의 의미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 무심히 지나쳐버리기만 한다면 누구인들 관심을 가져주겠습니까? 관심은 관심으로 이어지면서 순수의 정점은 곧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유추해봅니다. 

오늘 필자와 만난 야생화, 우주의 나이 137억 년, 그 긴 진화의 길에서 그 본질을 이룰 순수는 조금도 오염되지 않은 채 살아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미어집니다. 그러면서 순수의 실상이 이럴진대 “그렇다면 우리의 순수는 어디로 갔을까”라고 되뇌어 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진 가식적이고 인위적인 습성으로서는 순수를 감내하기가 어려울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동(動)하고 정(靜)하는 데 이를 행할 최초 근원은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그냥 우연히 생겨나지만은 않을진대 생기를 더해줄 근원은 아무래도 순수를 동반한 의식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거기에서부터 모든 일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씨앗 속에 우주 전체가 담겨 있고 꽃이 피어날 잠재적 역량 또한 순수 씨앗의 입자로부터 시작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순수함에 감동한 필자는 “들이나 산에서 자라는 야생화를 지켜보라. 우주 전체의 질서에 확실히 순응하며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되돌아보라, 우리는 그들이 엮어내는 순수에서 배울만한 것은 배워야 한다.”라고 소리칩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순수를 감지하지 못한다면 꽃을 본들 어찌 꽃을 보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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