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활동하다 귀국, 남해로 살러온 국악인 박채란씨.  
  

남해문화원 문화학교 가야금교실 강의요청 받아

외지인이 처음 남해를 둘러볼 때 어떤 이미지로 남해를 받아들일까?

환경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남해를 일컬어 ‘에코토피아’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

에코토피아는 잘 보존된 청정한 자연환경(에코) 속에서 자연과 호흡하며 살고 싶은 곳(토피아)을 일컫는 말이다.

이참에 또 한사람 남해에 홀딱 반해버린 이가 있다. 그는 완전히 남해에 정착하기로 결정하고 집을 마련해 주소까지 옮겼다. 남해에 상주인구가 늘어나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는 조금 독특한 삶의 이력을 가진 사람이다. 일본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던 국악인 박채란(57)씨. 그가 오늘 소개하고자하는 주인공이다.

국악인 집안의 딸

박채란씨는 47년 남원에서 대대로 소리꾼 내력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야금병창으로 명성이 높았던 그의 선친 박점옥은 광주 호남국악원 교수로서 많은 후진들을 길러냈다. 박씨는 아버지 박점옥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남도민요를 배우기 시작했다. ‘소리꾼’집안의 딸은 자신의 삶도 소리꾼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13살 소녀는 아버지로부터 가야금을 배웠다. 학교를 졸업하고서는 아버지가 놔주신 길을 따라 서울로 올라가 본격적으로 소리공부에 입문했다. 가야금 병창의 권위자였던 인간문화재 고(故) 박귀희 선생 문하생으로 들어가 가야금을 배웠다. 그리고 당시 판소리 권위자였던 인간문화재 고(故) 김소희 선생과 고(故) 강도근 선생으로부터는 판소리를 배웠다.

92년 국내 유일하게 부부 인간문화재로 인정받은 김일구(적벽가)·김영자(수궁가) 명창이 그의 사촌 오빠와 올케이다. 국악인으로서는 삶에서는 그의 집안은 좋은 배경이 돼 주었다. 그러나 박씨는 34살 나이인 지난 85년 일본으로 건너가기로 결심한다. 당시엔 연예인 비자를 얻는 방법으로 많은 국악인들이 일본으로 진출하게 되는데, 그들은 주로 일본 동경에 있는 사단법인 한국국악협회 일본지부에 소속되어 국악활동을 했던 시기였다. 박씨도 그들의 대열에 합류했던 것이다.

  
 
  
종종 고국의 공연무대에 서기도 했던 박채란씨.                               
  

연예인비자로 일본 건너가

올해까지 18년 동안 동경에서 국악활동을 계속해오는 동안 박씨는 한국국악협회동경지부 부지부장으로서 국악인들과 함께 수많은 국악공연을 통해 한국의 전통예술을 교포사회와 일본인들에게 전하는 민간외교관 역할을 맡아왔다.

매년 열리는 일본 전국 각지의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주최 광복절 기념 공연에 출연하는 등 그의 이력서에 기록된 큰 공연횟수만 하더라도 100회가 넘는다.

86년에는 ‘박채란 가야금연구소’를 개설, 교포들뿐만 아니라 국악에 관심이 많은 일본인들을 가르쳤다. 이듬해 ‘박채란 가야금연구소’는 동경시내에 4개의 분교를 설립할 정도로 무대를 넓혔다. 틈틈이 공연단과 함께 고국무대에 서기도 했으며 KBS 국악한마당에도 수 차례 출연했다.

89년에는 서울에서 ‘박채란 가야금 병창’, 최근에는 한국국악선교회를 통해 안숙선 명창 등과 함께 가야금병창 찬송가 음반을 내기도 했다.

고국으로, 남해로

“나이를 먹으니까 자꾸만 고국이 그리워지는 겁니다. 뭔지 모르게 아쉽고 그리운 것이 결국은 고국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고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했죠”

고국으로 돌아오기로 한 박씨는 진주에 사는 언니와 상의했다. 박씨의 언니는 남해에 자주 낚시를 왔다고 한다. 언니와 함께 처음 와본 남해는 박씨에게 ‘바로 이곳이구나!’하는 강한 느낌을 주었다. 언니와 함께 집을 구하고 주소도 정했다.

“이제 남해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라는 박씨는 남해에서 살면서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국악을 가르치면서 살고 싶다고 한다. 그래서 공용터미널 근처 제일부동산 2층에 사무실을 구하고 ‘박채란 국악연구소’를 꾸미고 있다. 8월말 개소식을 준비중인 박씨는 문화원에 들러 자신을 소개했다.

가능하다면 개소식에 맞춰 공연도 함께 준비해보고 싶다. 이동선 문화원장은 하반기부터 문화학교 가야금교실 강의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다.

이제 남해라는 지역사회에 정착해 평범한 지역주민 일원으로서 함께 호흡하며 살고 싶다는 박씨를 남해가 어떻게 감싸 안을 수 있을지 사뭇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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