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마을 이장의 안내방송이 귓전을 울립니다. 이날 방송은 여느 때와는 달리 “애석하게도” 혹은 “안타깝게도”라는 말이 서두를 장식합니다. 이런 방송을 들을 때면 의례적으로 “아 오늘 어느 분이 또 돌아가셨구나” 하는 것을 직감하게 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안부와 함께 덕담을 나누시던 분이셨는데 인연이 다하여 다시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죽음은 반드시 찾아오기에, 하나의 작용으로서 내가 반드시 치러야 할 의식이기에, 그 과정이 두렵거나 싫다고 하여 거부할 수도 거부하여서도 안 될 운명과도 같은 사실입니다. 
이러한 죽음은 우리 곁에 늘 상존하고 있지만 그 여운이라 할 인연의 끝, 육신의 흩어짐, 존재의 상실을 용인하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정이 두터운 사이였다면 그에 대한 그리움으로 솟구치는 마음을 추스르지 못할 것입니다. 
마을 어귀에 빈소가 마련되고 노제라도 지낼 요령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함께 모여 조문도 하고 유족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전 내내 숙연한 모습들은 노제가 끝남과 동시에 다시 일상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그가 살아야 했던 시간 그리고 그 흔적은 우리의 마음에 남아돌고 이제 남은 자는 또 한 생명을 잇기 위해 분주히 움직일 것입니다. 마치 죽음은 삶과 하나로 이어져 있으니 지금에 머무르지 말고 더 깨어있는 의식으로 나아가라는 무언의 훈시를 목도하면서 말입니다. 
이제 돌아가신 분은 가셨지만 살아있는 자는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나야 하는 것입니다. 살아나기 위해서는 살아가는 것 이상으로 지켜야 할 수칙이 있습니다. 그 수칙은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이 하나요, 너와 내가 하나요, 자연과 우주가 하나이며 몸과 마음이 하나입니다. 하나로 연결된 삶이라면 어떤 경계나 차이라도 능히 극복할 것이며 자신의 관점을 절대적이라고 여기는 사고도 버리고 비워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선행되지 않으면 죽기 전에는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습니다. 감정적 자아의식이 살아 있는 한 망상과 집착은 계속 이어질 것이고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반영이나 하듯 우리는 흔히 위기에 처할 때 죽어야 산다는 말로 의지를 불태우기도 합니다. 사(死) 즉 생(生)이라 하였고 생(生) 즉 사(死)라 하였습니다. 죽음에 이를 각오로 임해야 살 수 있고 무엇이든지 적당히 한다면 죽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신념을 가시화한다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죽음이 주는 또 다른 의미라면 하루에도 몇 번씩 죽을 용기를 지니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성질을 죽여야 하는데 죽이지 못해 일을 더 크게 벌인다거나 화를 가라앉혀야 하는데 마음 안에 움켜잡고 있는 분노의 성질을 죽이지 못해 분란을 더 키우는 경우입니다. 
철학적 소견으로 보아도 나의 에고(욕심, 욕망)를 죽여야 좀 더 새로운 의 식세계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죽음으로서 순간마다 자신을 살려낼 수 있다면 혼돈의 극치와 분별을 넘어 한층 고무된 기분으로 세상을 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모습이 이처럼 순일하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분열된 의식, 내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철저한 이분법적 사고, 극단적 편견 의식 그리고 이로 인하여 생기는 분노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사람을 해치기도 하고 잦은 감정으로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이러한 상태가 만연하다 보니 우리 사회의 표정이 그리 맑지 못합니다. 표정뿐 만이 아니라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인가 조차도 가름하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정작 자신의 에고가 죽음에 이르러서야 마음의 빛을 볼 수 있는 기회조차 망각한 채 세속의 흐름에 몸을 맡겨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이 상실되고 오욕(五慾)의 풍습이 시대를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로 심각합니다. 그래서 삶이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아니 살려내야 합니다. 모두의 마음에 잠재된 죽음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다시 삶을 살려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 명상으로 숨을 고르게 하면서 솔직 담백한 마음으로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봅니다. 
나의 깊은 곳에는 어떤 이야기가 들리는 지, 상대를 미워하는 마음이 왜 생겨나는지, 그리고 상대를 용서할 수 있는지, 또 내가 먼저 다가 설 용기는 없는지,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이지. 삶과 죽음의 속성으로 보면 살아있음도 그 명(命)이 다하면 죽는 것이요 죽는다는 것은 영원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으로 현재와 함께 합니다. 여기서 현재란 죽음과 무관한 것 같지만 부분이 전체와 융화하여 더욱 성숙한 결실을 만드는 과정이자 새로움을 담아낼 엄숙한 순간입니다. 순간을 동기로 한 의식은 죽음 이전의 순간, 죽음에 이를 순간, 죽음에 이른 순간, 죽음 이후의 순간이 다 다를 것이나 전체와 융합하는 우주의 질서에서 보면 또 하나의 세계를 여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결에서 과거의 죽음을 통하여 현재의 생명을 잇게 하고 현재는 미래의 씨앗을 생산하는 것이 삶의 실상이라면 우리는 죽음을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죽음이란 궁극적으로 어제보다도 더 나은 오늘, 오늘 보다도 더 나은 내일을 창조할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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