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이층집
그리운 이층집
  • 남해신문
  • 승인 2020.07.10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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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ㅣ 임종욱 작가(길 위의 인문학 강사)

‘이층집’이라 하니까 근사한 정원이 딸린 주택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그리워하는 이층집은 질 좋은 벽돌 한 장 쓰이지 않은 허름한 목조 건물이다. 어디 시골 고향집을 말하나 싶겠지만, 버젓이 서울 한복판에 있었다. 넓이도 평수로 따지기 부끄러울 만큼 좁고 누추했다. 유서 깊은 건물이라서 잘 보존되어 있냐 하면 가뭇없이 사라진 지도 몇 십 년은 족히 되었다.
이층집은 내가 대학을 다니고 대학원, 그리고 조교와 연구원, 강사까지 지내면서 청춘을 씻어낸 모교 앞에 있던 술집이다. 대학교에 입학하니까 선배들이 축하한다고 끌고 간 집이 그곳이었고, 나는 강의실보다 그곳에서 더 오래 머물렀다.
술집 이름도 없었다. 안주 이름이 적힌 유리창을 댄 목재 미닫이문이 달린 이 술집을 우리들-아니 한참 선배들 때부터-‘이층집’이라 불렀다. 유리창 몇 장은 금이 가거나 깨져 종이로 풀칠이 되어 있었다. 문을 밀어 열면 왼쪽으로 화장실 문이 있다. 여기서 숱하게 많은 선후배들이 취기를 이기지 못해 오바이트를 했다.
아래로 서너 계단을 내려가면 술집 마당이다. 모서리까지 다 헐어버린 술상이 네댓 개 대중없이 널려 있고, 술상마다 등받이도 없는 낡은 의자들이 지친 표정으로 서로 마주보았다. 그리고 한 귀퉁이에 주방이 있었다.
다시 미닫이문을 열면 화장실과 각을 이루며 -사실은 천장마저 낮은 다락방이었지만-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인다. 제대로 만든 계단도 아니어서 판자를 붙여 가파르게 각을 주고, 발을 딛도록 넓은 각목을 도드라지게 듬성듬성 못으로 박은 모양새였다. 거기 평상들이 서너 개 놓였고, 좀 길게 술을 마실 참이거나 합평회나 마지막 강의가 끝난 뒤 뒤풀이를 하려는 치들이 주저앉아 밤을 안주 삼아 죽치고 술을 마셨다.

이렇게 해서 이 술집은 ‘이층집’이 되었다.
우리들에게 이층집의 용도는 단순명료했다. 국문학과 학생들의 모임장소였고, 술추렴 아지트였다. 교수실이 어디 있는지는 몰라도 이층집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국문과 학생은 없었다. “이층집에서 만나자.” 하면 다들 알고 찾아왔다.
이 술집의 주인은 충청도 출신의 아줌마와 고향이 어딘지 도대체 짐작도 안 되는 아저씨 두 분이었다. 언제 이층집을 차렸는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입학할 무렵부터 이미 나이가 지긋했고, 세상을 살면서 겪은 풍파가 얼굴에 묻어났다. 그 무렵에는 서른만 넘어도 노인처럼 보였으니, 어쩌면 아주 늙은 나이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두 분은 우리에게 ‘이층집 아줌마’, ‘이층집 아저씨’로 불렸다. 이름은 지금도 모른다.
아줌마는 꽤 찰지지만 걸걸한 목소리로 주문을 받아 술과 안주를 날랐고, 아저씨는 늘상 말없이 술상을 치우거나 낮이면 주변에 점심 배달을 했다. 우리가 술을 권해도 대작하는 일은 없었다. 아줌마는 주름진 얼굴이었지만 안색은 하얀 편이었는데, 아저씨는 정말 얼굴이 검었다. 허리춤에 열쇠가 몇 달린 고리를 차고 있어 쩔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우리들이 마신 술이란 소주-25도짜리다-아니면 막걸리였다. 안주래봤자 김치찌개면 괜찮은 편이었고, 대개는 보잘것없는 푸성귀 무침이었다. 어쩌다 계란말이나 고등어찌개가 올라오면 호사고, 가뭄에 콩 나듯 누가 군대를 가거나 휴가를 나오거나 제대를 했다면 닭도리탕이나 불고기가 올라왔다.
술을 마시다가 흥이 나면 젓가락을 두드리며 철지난 유행가 아니면 운동권 노래를 목청이 터지라 불러댔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그 당시 우리들에게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없었으니 후줄근한 우리의 처지에 딱 어울리는 노래였다. 우리들은 그곳에서 문학에 대해 혁명에 대해 사랑에 대해, 거창하지만 겉멋 들지 않은 시빗거리를 흐린 눈빛으로 뇌까렸다.
지하철이 먼저 끊기고 버스마저 끊기자 우리는 아예 그곳에서 밤을 새기도 했다. 누군가 맡길 시계를 내놓으면 허름한 여관방을 갈 수 있었지만, 그렇게 통 큰 용사는 자주 나오지 않았다. 아줌마의 눈치와 지청구를 한 귀로 흘리고 외상술에 취할 무렵 훤히 동은 트고 “신문이요!” 하는 조간신문 배달부의 알람소리를 듣기 예사였다.
돈이 넉넉지 못했던 우리는 외상이 다반사였다. 놀랍게도 그 당시는 학생증만 맡겨도 아줌마가 외상을 받아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학생증을 호패처럼 소중하게 여겼다. 아줌마는 학생수첩만한 낡은 공책에 이름을 적고 외상값을 기입했다. 그 술값은 갚아 지워지는 일보다 상흔처럼 아물지 않는 일이 수두룩했다. 나는 외상을 져도 잘 갚는 편이었지만, 복학했다가 졸업할 때까지 미뤄둔 채 떠나는 탕아도 적지 않았다.
해마다 10월 한글날 즈음에 우리 과는 학교 운동장에서 체육대회를 열었다. 이때면 교수뿐만 아니라 졸업한 동문들도 오랜만에 학교를 찾았다. 축구 시합을 끝내고, 서로 옛 추억을 더듬으며 운동장 한 구석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노라면, 으레 ‘이층집 아줌마’가 외상 수첩을 들고 찾아왔다.
“이 화상들아, 우리 집 망하면 니들 어디서 술 쳐먹을겨. 시방은 돈도 벌 테니 외상값 좀 갚어.”
잠시 머쓱해하거나 너스레를 떨다가도 결국은 지갑을 꺼내 밀린 외상값을 갚았다. 아줌마의 외상 수첩은 우리 국문과의 학적을 기억하는 또 하나의 비망록이었다.

그렇게 이층집은 우리들에게 모교였다.
이층집이 언제 없어졌는지는 전혀 기억에 없다. 눈물이 지워지듯 세월이 흐르면서 두 부부도 늙어갔을 것이고, 학교 주변이 개발되면서 허름한 이층집은 버텨내지 못했을 듯싶다. 내가 초짜 강사일 때까지도 있었는 듯 싶은데, 학생들의 술 취향이 진화하면서 차츰 발길이 끊겼겠거니 여겨진다.
하나 기억에 남는 일은 있다. 언제였는지 뚜렷하지 않지만 누군가가 이층집 아저씨가 암 투병 중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아! 하면서 다들 가슴이 먹먹해졌다. 우리 젊음의 한 실록이 뜯겨나가는 소리를 우리들은 들었다.
졸업한 친구와 선후배들이 모여 병문안을 갔다. 아주 어두운 골방에 아저씨는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원래 검고 마른 얼굴이었지만, 더 핼쑥해진 아저씨는 몸을 일으켜 우리를 맞으려다 힘에 부쳐 누웠다. 눈물이 핑 돌았다. 아줌마의 피어린 하소연을 들으면서 우리는 잠시 아저씨를 둘러쌌고, 누군가는 밀린 외상값을, 누군가는 얼마간의 정성을 봉투에 넣어서 내놓았다.
그 이후 우리들은 이층집 아줌마와 아저씨를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추억의 이층집은 벌써 그 전에 사라졌다. 마지막 인사를 나눈 지도 까마득하니, 두 분은 이제 이 세상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저 두 분 다 평안히 여생을 마치고 극락왕생하셨기를 빌 뿐이다. 좋은 일만 하셨으니, 당연히 그럴 것이다.
남해에 살다보니 몇 해만에 한 번 학교를 들르게 된다. 교정은 크게 달라진 게 없지만, 학교 주변은 많이 변했다. 건물도 바뀌었고, 사람도 가게도 딴판이 되었다. 중국집 ‘강서(江西)’ 한 곳만 창연한 역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오두막집이나 다름없었던 ‘이층집’은 어디 있는가? 길은 크게 바뀌지 않아 “아, 저기쯤이려니.”하고 짐작만 할 뿐 지난날의 못 한 동가리 남아 있지 않다. 이층집에서 마셨던 술과 막걸리, 쫄면 맹물에 김치를 더 넣어 재탕, 삼탕해 먹던 찌개를 이제 다시는 맛볼 수 없다.
세월이 흐르면 자취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만, 기억은 더욱 새록새록한 경우가 있다. 내게는 ‘이층집’이 바로 그런 곳이다. 언젠가 그 자리에 “여기 이층집이 있었다.”고 새긴 비석을 세웠으면 좋겠다.
그리운 이층집. 우리들의 젊음은 갔어도 ‘이층집’과 아줌마, 아저씨는 우리 국문과 졸업생들의 마음 한 구석에 언제나 푸른 하늘처럼 맑게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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