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사건과 무관한 故 박진경 준장
제주 4.3사건과 무관한 故 박진경 준장
  • 남해신문
  • 승인 2020.06.29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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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기고 ㅣ 강태경 전 계명대학교 경영대학원장
강태경 전 계명대학교 경영대학원장
강태경 전 계명대학교 경영대학원장

제주 4.3사건과 박진경(朴珍景) 대령에 관한 진실은 우리 남해 사람들의 관심사다. 필자는 이에 관한 몇 편의 자료를 참고하여 남해신문에 기고하고자 한다.

4.3사건과 그 후에 발생한 제주도 사건들은 희생자와 피살자가 동반한 양론이 담긴 우리 민족의 비극의 역사다. 이 양론은 왜 희생되었느냐, 왜 피살되었느냐에 관한 중론이라 하겠다.

비극의 출발점은 1945815일의 광복일 이후부터 시작한 사상(思想) 대립이다. 이 사상 대립은 한반도에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는 과정에서 민주적 절차에 의한 민족 전체의 의사를 도외시하고, 소수의 사상가들과 미국ㆍ소련 등 외세가 국토를 분단시킨 것이다. 동시에 그 사상 대립이 우리 민족의 새로운 비극을 초래하게 된 원인이기도 했다. 종래에는 우리 국토에 6.25 전쟁을 초라헤게 한 것이다.

이전 시대의 전후 배경에서 필자는 불행한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 일제 말기에 초등학교를, 해방 후 사상 대립의 혼란기에 중학교를, 6.25 전쟁시는 교복을 벗고 군복을, 책을 놓고 총을 든 소년이 사상(死傷)의 전선을 4년간 누비고 다녔다. 함께 입대했던 전투들 중 돌아오지 못한 전우를 생각하면 정신이 혼미해진다. 지금도 꿈에 중공군을 만나면 꿈을 망친다. 빈농가의 청소년들은 설 곳, 앉을 곳 모두가 불안과 공포, 죽음의 자리였다.

제헌 국회의원 선거 대의 여기 저기의 폭동, 경비대 군인과 경찰관의 빈번한 패 싸움, 국방경비대 내의 남로당에 포섭된 병사가 일으킨 허다한 반란사건, 제주도 사건, 여순 반란사건, 지리산 공비토벌에 의한 민간인 피살사건 등등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려는 사상 세력과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려는 사상 세력 간의 혈투였다.

이런 사건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더욱 가난하게 했다. 미래의 살의 희망도 암담하게 했다. 사상을 갖는 것은 자유인데, 왜 폭동을 일으켜 동족이 피를 흘리게 하느냐가 문제였다.

제주도에서 고인이 된 박진경 대령의 피살사건은 필자에게는 충격을 주었다. 이유는 그 분은 내 모교(초등학교)의 대선배였고, 남해군의 초대 고급장교였으며, 대한민국 창군 멤버 가운데 유능한 인재였기 때문이다. 사건의 진실을 아고 싶어, 오래전에 관계 자료를 모았다. 김성준 편저의 한국역대전란사(韓國歷代戰亂史)’, 채명신 장군의 회고록(‘死線을 넘고 넘어’), 월간 조선 발행의 韓國現代史119大事件등의 자료 안에 4.3 사건을 포함한 제주도의 사건과 박진경 대령의 피살 사건 기록이 담겨 있었다. 채명식 장군은 소위 계급장을 달자, 박 중령에게 선발되어 제9연대, 11연대에 같이 근무하면서 당시의 제주도 사건들을 구체적으로 기록했었다.

이들의 기록에 의하면, 제주도 사건의 원인을 잘 볼 수 있다.

첫째, 해방 후 제주도()는 유일하게 남로당 조직이 강했던 곳이고 그 조직이 강력해지자 투쟁력도 커져 소수의 경찰력과 국방경비대 1개 대대 병력과 맞먹는 수준이었다.

둘째, 일제시대에 중국에서 근무했던 제주도 출신의 일본군 학도병들이 귀국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학력도 높고 공산주의 사상을 가졌다. 전라남도 남도당 산하의 제주도 남로당을 조직하여 짧은 기간에 제주도민 중에 유식자, 공공기관장, 행정관리청장들을 당원과 간부로 포섭했고, 국방경비대 장교와 고급하사관들까지 포섭했으며 이들에 의해 사병들까지 포섭됐다.

셋째, 남로당은 치안업무를 담당하는 경찰관과 그 가족들이 남로당 조직활동 감시와 방해를 할 경우 폭력과 살상으로 경찰력을 위협했다. 그들은 경찰력을 말살시키려 했다.

남로당은 인민해방군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면 단위에 1개 중대를 편성하고, 당시의 무장병력은 약 500, 세부조직은 각 마을에 지구사령부, 그 산하에는 자위대, 돌격대, 결사대, 큰 마을에는 인민재판소, 인민보안서를 설치했고, 인민해방군이 보유한 무기는 일제 소총, 일본도, 죽창, 철창, 곤봉 등이었다. 이들의 총사령부는 한라산 큰 굴 속에 있고, 산하 투쟁분대는 한라산 여러 곳의 굴 속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렇게 큰 조직과 강한 조직을 만들어 전투력을 갖춘 요인은 무었이었던가. 일제시대의 제주도는 지금과는 달리, 식민지배기 밭농사 중심의 빈곤한 생활과 해녀들 중심의 가정 생활을 해방 이후에도 계속 유지했다. 이런 환경에서 제주도민들은 남로당 선동의 무기인 공산주의 사상과 공산주의 경제론에 쉽게 동조했고 제주도 언어, 문중의식, 문화가 남로당 조직에 결집력을 강화시켜주었던 것이다. 일종의 지역 독립국과 유사한 환경을 조성했던 것이다. 이런 지역민 의식은 육지인이 와서 권력행사를 하는 것에 강한 반항심을 갖기에 충분한 조건이다.

제주도의 초대 국방경비대는 1개 대대병력으로 제9연대를 조직했고, 장교와 사병들은 거의 제주도 출신들이었다. 2연 연대장인 이치엽 소령 시대까지는 남로당은 경찰이 마찰을 빚기도 했지만 국방경비대 사이에서 마찰은 없었다. 3대 연대장 김익렬 소령이 부임하자, 이때 1948510일의 초대 국회의원 선거가 예정되어 있던 시기였다. 남로당은 5.10 총선을 무산사키기 위한 계획과 작전을 세워두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구국 투쟁, 폭동사건, 총파업 등을 일으켜 성공시킨 경험을 살려 남로당 지도부는 5.10 총선을 무산시킬 수 있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제주도 출신의 경찰력으로서는 대응하기가 역부족이었다. 정부는 충남과 전남의 경찰관을 파송시켜, 제주도 경찰력을 보강시켰다. 남로당은 육지에서 지원해 온 경찰력을 의식하고 5.10 선거 전에 변란을 일으켰다. 그것이 소위 4.3사건이다.

그래서 5.10 총선은 무산되었고, 다음 기회로 넘어갔다. 정부는 육지에서 1700명의 경찰관을 증파시켰고, 부산주둔의 제5연대의 오일균(吳一均) 소령을 파송하여 남로당과 협상하게 했다. 당총책 김달삼(金達三)은 협상을 거절했고, 오일균 소령도 좌경사상을 가진 군인이어서 협상의 성립하지 못했다. 53일까지 희생된 경찰관과 공무원들, 그들의 가족을 포함해 18, 부상자 33, 민간인 사망자가 37, 부상자 58명으로 밝혀졌다.

박진경 대령은 국방경비대 총사령부의 인사과정으로 근무하다가 대령진급 예정 상태에서 해체될 제9연대장으로 515일에 임명받고 신규 편성의 제11연대장이 되었다. 필자가 아는 바로는 박 대령은 일본 대판외국어대학 영문과에 재학중에 일본군학병으로 징집되어 제주도에서 종전을 맞이한 것으로 안다. 미 군정시대에는 군사영어반에 입대하여 어학능력과 군사지식 면에서 우수한 군인임을 인정받았고, 남해인의 특성인 근면과 성실, 치놔성의 인품을 겸하였기에 유능한 인물로 인정받았다.

11연대장으로 부임하자 박 중령은 제주도 사건들을 개선하는데 3가지 전략을 세운 것으로 나타났다. 그 하나는 연대 내의 남로당과 인민해방군에 가담한 장교나 사병들을 색출하여 선무교육을 강화하는 것, 둘째는 경비대와 맞서 싸우자는 인민해방군을 토벌하는 것, 셋째는 마을 안에 거주하는 민간인들을 설득하여 생업에 종사하도록 보호하고 인민해방군에 협력하지 못하도록 선무공작과 방위업무를 과감하게 추진한 것이다. 방위업무로서는 마을 입구에 돌담을 쌓고 경비초소를 만들어, 신뢰할만한 군인들을 파견시켜 마을 내외의 동향을 감시하고, 동민을 보호하게 했다. 그러던 중 분대 내에서 사고가 일어났다. 그것은 제1중대장 정 모 대위가 분대 내의 일본군 출신 병사와 적색병사 40명을 해방군으로 탈출시켰고, 그들은 부대의 탄약고를 습격하여 탄약을 탈취하여 한라산으로 도망갔다. 박 대령의 과감한 선무공작과 주민보호 경비가 강화되자 남로당 조직과 해방군 조직은 허술해져 갔고 산중에 고립된 조직원들의 식량보급이 어려워졌으며 이전에 비해 투쟁활동이 위축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부대 내 적색병사들은 첩보활동과 암살작점이 더 어려워져 암살조직 지휘자 문상길(文相吉) 중대장과 그 조직은 박 대령을 암살하려고 하기로 했다. 박 중령이 대령으로 진급되어 축하연을 마치고 술에 취해 사무실 침대에서 곤한 잠을 자는 기회를 노렸다.

부대 내의 적색병사들은 과거에도 제2대 연대장 이치업 소령을 죽이려고 음식에 독약을 넣기도 했었다. 이 일로 이치업 소령은 1개월 동안 위장병으로 고생을 했고, 3대 연대장 김익렬 소령도 죽이려고 했다. 김 소령과 같이 사는 그의 개가 범인이 오는 것을 인식하고 짖어서 김 소령 암살은 미수에 그쳤다. 박진경 대령에게 선발되어 제3중대 제1소대장으로 근무했던 채명신 소위도 자기 부하들에게 자기 생명을 잃을 뻔했던 때가 여러 번 있었다고 했다. 그런 위기 때에도 자기를 구해준 병사가 정보를 알려 주어 그때마다 아슬아슬하게 피살을 면했다고 했다. 자기를 제주도에 같이 가서 근무하자고 선발해 준 자기 상관이 부하에게 피살된 점에 대해 유능한 통솔자, 뛰어나고 훌륭한 군인이었다고 채명신 소위는 회고록에 기록했다. 그리고 살인범인은 자기의 직속상관인 제3중대장 문상길 중위였다고 했고, 총을 쏜 병사는 위생병인 일등병이라고 했으며 공범자 김 중사도 자기를 해치려고 했다고 한다.

결론을 내린다면 박진경 준장(사후에 준장으로 서훈)은 제주도 4.3 사건과는 직접 관계가 없었고, 4.3 사건과 그 이후의 기타 사건의 여파로 경비대에게 도전한 남로당과 인민해방군, 부대 내의 적색사병들과 싸운 지휘관이었다. 또 박 준장은 제주도 민간인들에게는 위험한 해방군에게 흡수당하지 않도록 보호해주었으며 생업에 종사하여 가족과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 공로자로 평가받았다.

4.3 사건과 그 이후에도 계속 발생했던 비참한 사건들은 반정부사건이 아닌 처음부터 반국가 사건으로 확대되어 갔기 때문에 제주 지역은 전투장으로 확대되었다. 그 불행한 전투장에서 본의 아니게 여러 사건에 개입되어 희생된 사람들, 사건과 무관하게 희생된 사람들은 엄격하게 선별하여 그 분들의 명예와 가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 역사가 할 의무라고 생각한다. 역사기록은 육하원칙과 정치성 없는 정사가 되게 해야 하며 아울러 우리 고향 남해의 인물, 박진경 준장은 남해군의 역사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역사에서도 훌륭한 군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진실을 모르고 고인에 대해 폄훼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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