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16년간 한 회사에서 회계 업무를 맡으면서 연봉 5000만원과 회사에서 제공하는 차량과 유류비, 식대와 연ㆍ월차 등은 넉넉했지만 ‘시간’은 부족했다는 ‘봄이 엄마’. 1978년생 변희진 씨는 인생의 전환점이 필요했다. ‘전혀 새로운 일’로 여유를 가지면 낫겠지 생각했던 그녀는 16년간 근속한 회사를 그만두고 새 출발의 의미로 직장을 ‘출판사’로 옮겼다. 그곳에서 2년간 회계 업무를 맡으면서 누린 여유를 통해 ‘덜 열심히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구나’를 깨닫고 ‘제대로 쉬어볼까?’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컴퓨터 서버 관련 업종만 해오던 남편 김세진 씨에게 털어놨다. “더 늦기 전에 한 2년 쉬어보는 건 어떨까? 아예 낯선 곳에서 새롭게 완전히 쉬는 거지. 전셋집 계약이 2년이니 1년은 말 그대로 쉬며, 남은 1년은 그 이후의 우리 인생을 어떻게 살지를 고민해보는 것, 어때?” 부부는 통했다. 6살, 10살인 두 아이에게도 서울을 떠나 낯선 시골에서의 삶이 좋을 것 같았다. 더 늦어졌다간 ‘남해에서 살아보기’란 불가능할 것 같았다.

▲ 내동천마을에서 찾은 보물 같은 ‘전셋집’과 보물 같은 이웃

바다-뷰(VIEW)가 아닌 ‘논’이 잘 보이는 탁 트인 집, 무엇보다도 전세를 구할 수 있어 ‘살아보기’기 가능했다는 희진 씨. 딱 한 번 남해로 와 봤던 그 경험이 좋아, ‘가능한 다르게 살기’가 좋을 것 같아 근 1년간 각종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남해군 살 집’을 찾다가 지난해 4월말 내동천마을의 지금의 집을 보는 순간, 남편 세진 씨가 먼저 움직였다. 5월 1일 서울에서 내려와 집 계약을 하고 5월 8일 어버이날 양가 부모님께 ‘남해 귀촌’을 말씀드리고, 5월 9일 각자의 근무지에 정리를 말씀드리고 두 달을 정리해 작년 7월 남해군민이 된 두 사람.
삼동초와 보건소, 마트와 은행, 식당 등이 걸어서 15분 내외에 있는 게 괜찮은 조건이었고 유치원 차량과 학교 버스가 집 앞까지 들어오는 것도 좋은 조건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텃세’ 이야기를 잔뜩 들었는데, 내동천마을주민들은 다들 너무나 반겨주셨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 정도 살자 슬슬 고민이 생겼다.

▲ 귀촌, 청년, 네트워크…좋지만 현실은 ‘놀이터 찾아 삼만리’

살아보니 대부분의 정책이 ‘관광객’을 향한 것이었지 ‘실제 거주자를 위한 것’은 아님을 느꼈다는 희진 씨. 최근에 청년네트워크가 있다고 해서 참여하면서도 ‘청년 엄마로서 느끼는 체감도는 낮았다’고. “청년사업예산에는 청년의 자녀 연관 사업이나 가족을 아우르는 뭔가를 하긴 어렵고, 정말 딱 청년 동아리 활동이나 청년 본인의 사업을 위한 예산에 국한돼 있어 한계가 느껴졌다. 청년을 오게끔 하려면 터전을 잡도록 아이 키우기 좋은 환경으로 해줘야 할 텐데, 남해에서 청년 사업비로 일하다가 연인 만나 결혼해 보니 ‘아이 키우려면 도시 가야겠네?’로 생각이 흐르면 도로 끝 아닐까. 일회성이 아니라 생의 연속성을 보고 진행이 됐으면 좋겠다. 특히 아이를 둔 ‘청년 엄마’들은, 읍 아닌 면에 사는 엄마들은 ‘놀이터 때문에 이사를 가야 하나?’ 싶을 정도로 스트레스가 극심하다”고 터놓았다. 또 “도서관, 놀이터, 미술학원, 수영장 등 대부분의 편의시설이 읍에 치중돼 있다. 솔직히 도서관은 어른들보다 아이들 때문에 가는 곳이지 않나. ‘작은도서관’이라고 이름 붙은 곳을 가보면 관리도 전혀 안 돼 있고, 이름뿐이었다. 면에도 도서관 혹은 놀이터만이라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삼동에 사는 우리는 놀이터 찾아 미조까지 간다. 도시 살던 아이들을 두고 ‘산과 들에서 놀면 좋겠다고 하시지만 그건 어른들의 생각일뿐이고 지금은 시골 아이들조차 TV로 문화를 다 접했기에 놀이터는 기본이다. 풀독걱정에 뱀 나올까 불안해서 심부름 보내면서도 풀부터 조심시키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이 가진 힘에 경외심을 갖고 자연과 더 친해지려 애쓰는 가족. 특히 코로나19를 이 자연 속에서 좋은 이웃과 이겨냈기에 남해에서의 삶에 희망을 본 식구는 매일 아침 푸른 논을 바라보며 어떻게 이 행복을 이어갈 수 있을까 궁리한다.

남해에서 살아보니 ‘최저시급’ 문제가 와 닿았다

정착하려면 ‘일자리’가 시급했다는 희진씨네 가족. 부부가 도시에서 체감한 근로환경과 급여 수준은 꿈도 못 꿀 것이었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는 게 시급했으나 그마저도 만만찮았다. ‘일자리’ 자체도 적었으나 인식과 처우는 더 놀라웠다. “토요일이나 일요일, 공휴일에도 근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경우 평일 이틀을 휴일로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인식하시더라. 공휴일이나 토, 일 근무인 경우는 주휴수당을 더 지급해야 하고, 연월차 개념도 정립돼 있어야 하는데 남해군에서 그런 일자리는 찾기 어렵다. 대부분의 일자리가 최저시급 수준에 머물러 있어도 일자리 자체가 적다 보니 ‘사람 귀한 줄 모르고’ 일자리 처우 개선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남해 와서 처음으로 최저시급이 얼마인지 살펴보게 되었다”는 희진 씨.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어떻게 최저시급이 만원도 안되는데 이 비싼 물가를 감당하며 살지? 시골이니 자동차는 당연히 있어야 하고, 기름값도 훨씬 비싸고, 식대도 포함 안 돼 있는 곳이 많으니 갈수록 취업의지가 꺾이게 된다”고 덧붙였다.

 

저작권자 © 남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