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0년대 초 고현면 대곡리 안동 장 씨 일행 3명이 경기도 화성과 경상도 안동에 보사관계로 갔다 돌아오는 길에 함양 주막에 묵었다. 때는 늦가을이나 초겨울 무렵으로 날씨가 상당히 싸늘해서 방에 군불을 때고 유숙객들이 모두 한 방에서 잠을 잤다. 손님 중에 동학 교주인 최제우 선생(1824-1864.4.15.)이 계셨다. (그 당시에는 누군지 몰랐다.) 선생은 장씨 일행 중 가장 나이가 젊은 장씨와 마음이 통했는지 밤을 꼬박 새우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때 장씨는 나이가 30을 갓 넘겼으며, 풍골이 장대하고 훤출했으며 글재주도 있었고 말도 잘 했다고 한다.  

아침이 되어 헤어질 때 최제우 선생은 장 씨의 주소를 물었다. 집에 돌아오고  3일 후에 최제우 선생이 직접 장 씨 집을 찾아 왔다. 선생은 며칠 동안 장씨 집에 묵으며 장 씨의 일터를 따라 다니며 동학의 교리를 설명하고 입교를 권유했다. 마침내 장 씨는 선생의 학문과 교리에 승복하여 동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장 씨는 남해 최초의 동학교도이자 초대 접주(接主 : 동학에서 교구 또는 포교소의 책임자)가 되었다. 선생은 남해를 떠나시면서 장 씨에게 <동경대전>의 필사본과 같은 동학의 책자를 주고 포교를 많이 하라고 하셨다. 최제우 선생은 남해를 떠나시고 나서 서너 달 뒤에 체포되어 4월에는 참형을 당하셨다. 그 소식을 들은 뒤에도 장 씨는 포교활동을 계속했다. 

다음 해 여름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1827-1898)이 장 씨를 찾아 남해에 오셨다. 때는 여름이라 옷이 땀에 절어 있고 남루해서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였다. 장씨는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게 하고 교주의 옷을 세탁하게 했다. 그리고 며칠 쉰 뒤에 장접주는 해월 선생을 모시고 남해 전 군을 다 돌아다니며 포교활동을 했다. 그래서 남해는 동학교도가 없는 마을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교주가 남해를 떠날 때는 가솔이 장만한 새 의복(도포를 비롯해서 잠방이까지)을 입혀 드렸다. 장씨는 교주를 모시고 집을 나와 덕신리 하노인 댁에서 하루를 묵고 노량 나루터에서 배에 태워 떠나시는 것을 보고 돌아왔다. 

1894년 1월 전라도 고부에서 동학교도의 봉기가 있었다. 처음에는 남해 동학교도들은 조용히 있으라는 지시가 있었으나 몇 달 후 다시 지시가 내려왔다. 지시 내용은 병기를 준비하고 교도를 무장시켜 왜놈과 전쟁을 대비하라는 것이었다. 지시에 따라 접주는 교도들을 모집하여 송충골 옛 절터(대곡리 음지마을 동쪽 뒤편)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훈련대는 큰 대나무를 잘라 죽창을 만들고 한 움큼 되는 단단한 나무를 베어 창대를 만들었다. 낫이나 괭이, 쇠스랑 같은 쇠붙이를 모아 대장간에 부탁해서 창과 칼을 만들고 대장의 지휘도도 제작했다. 지휘도는 대장의 몸집에 맞게 만들다보니 보통 남자들은 들고 다니기에도 무거울 정도였다고 한다. 탁월한 지휘 능력과 인자한 인품에 감복하여 대원들이 접주를 “우리 장군님, 우리 장군님”이라고 불렀다. 이 말에서 훗날 아장군네(我將軍家)라는 집안명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장 접주는 칼을 너무 잘 다루었기에 짚단을 세로로 세워 놓고 후려쳐 베면 짚단이 그대로 붙어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 칼은 나중에 접주가 자수한 뒤에 관헌에서 나와서 가져갔다. 창은 몇 자루가 화방사 대웅전 뒤 괘불채 밑에 오랫동안 숨겨져 있었는데 뒤에 화방사에 불이 나서 다 없어졌다고 한다. 

훈련 초기인 송충골에서 훈련할 때는 교도들의 점심과 간식은 장접주의 가솔과 여신도들이 모여서 준비했다. 주먹밥은 함지에 담고 국과 된장 김치 등은 동이에 담아 10리 길을 이고 지고 날랐다. 훈련받는 사람이 점차 많아지자 읍에서 가까운 곳이라 군사훈련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관헌에 알려질 위험이 있고 훈련교도의 숙식에도 문제가 있어 훈련장소를 화방사 옛 절터(빈대터)로 옮겼다. 숙식은 절 포교당에서 해결했다. 화방사 옛터는 평지이고 민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훈련과 비밀유지에 적합한 곳이었다. 

훈련을 3개월 정도 하고 최종적으로 확정된 병력은 300여 명 정도였다. 출전 식량은 교도들이 가져온 치성미를 배분했으나 부족한 양은 각자가 조달하여 최소한 10일 이상 먹을 양식을 준비하게 하였다. 쌀, 찹쌀과 보리, 콩을 볶아 미수가리를 만들어 전대에 넣어 열십자로 어깨에 차고 출발했다. 

출정일은 하동 고승당산 집결 예정일 3일 전에 노량에 집결하여 도선(渡船)하기로 했다. 그리고 도선 준비는 이미 덕신리 하영감을 책임자로 하여 설천 지방 교도들에게 지시해 두었기 때문에 노량에 도착하면 곧 바로 출발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당일 노량에 집결하여 도선을 기다리는데 약속해 놓은 배가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룻배 한 척에 선발대 20명 정도만 노량바다를 건너가게 했다. 다음날에도 배가 나타나지 않아 본대는 노량에서 이틀을 대기해야만 했다. 3일째 되는 날 선발대가 돌아와서 정보 누설로 이틀 전에 일본군이 급습하여 고승당산 전투는 이미 패전하여 뿔뿔이 흩어졌다는 사실을 알렸다. 선발대 중에는 부상자 3명도 있었는데 그들도 함께 돌아왔다. 그래서 남해동학군 본대는 전투에 참가하지도 못하고 노량에서 해산을 해야 했다. 

장 접주와 간부들은 접주의 집으로 돌아와 대책을 논의하던 중 관헌에서 체포령이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산으로 도망을 가서 여러 날을 숨어 지냈다. 어느 날 동굴 속에 숨어 있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 담배 피울 준비를 하던 한 간부가 바깥에서 체포조들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다. 한 사람이 “여기 굴이 있는데 한번 들어가 보자.” 그러자 다른 사람이 “이봐, 입구에 저렇게 거미줄이 쳐져 있는데 그 안에 무슨 사람이 있겠나, 괜한 수고하지 말고 가자.” 하고는 사라졌다. 그 후로는 장접주와 동학 간부들은 거미를 은인으로 여겨 함부로 잡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장 접주는 계속 도망 다니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기가 자수할 테니 다들 집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그래서 접주 자신은 집으로 돌아와 새옷을 갈아입고 관헌으로 가서 자수했다. 자수한지 한 열흘 뒤에 시체를 찾아가라는 연락을 받았다. 접주 가족들이 큰 대로 들것을 만들고 인부를 사서 현청에 가서 시신을 인수하려 왔다고 하니 느티나무 아래 거적에 덮여 있는 것을 가리켜며 저기 있으니 가져가라고 했다. 그래서 얼른 시신을 들것에 옮겨 싣고 유림동 고개 주막집까지 한달음에 와서 잠시 쉬며 인부들에게 술대접을 했다. 그 사이에 장 접주의 아내가 시신을 만지니 온기가 있는 것 같아서 자꾸 주물러 주니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고 코밑에 손을 대어보니 약간의 훈기가 있었다. 그래서 주막에 부탁하여 막걸리를 데우고 미음을 시켜서 숟가락으로 조금씩 떠먹이니 숨기가 조금 느껴지는 것 같아서 손자와 같이 계속 몸을 문지르니 숨이 터지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접주의 가족들은 인부 두 명을 더 불러 여섯 명이 교대로 들것에 실어 한실까지 왔다. 집에 와서 물을 데워 몸에 달라붙어있는 옷에 뿌려가며 옷을 들추니 몸 전체가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온통 피멍이 들어 있었고 상처 투성이었다. 그 때에는 약이 별로 없었고 두들겨 맞은 데는 똥물이 제일이라 여겼기에 오줌을 걸러 데워서 몸에 바르고 똥물로 3년 반을 치료 했다고 한다.

똥통에 대나무를 넣어두면 대나무 마디 속에 맑은 물이 고이는데 그 물을 바로 마시거나 술에 타서 마셨다. 또한 똥을 돌 위에 올려놓고 불로 태워 볶아 가루를 만들어서 술이나 약을 넣어 먹이기도 했다. 때로는 집안 식구들이 온 산을 돌아다니면서 약초를 캐와서 달여 먹이고 몸에 바르기도 했다. 남해 산은 물론이고 멀리 하동 소오산까지 가서 온갖 산약제를 수집해 왔다고 한다. 이런 노력 덕분으로 장접주는 거의 4년 만에 병상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장 접주의 자수 이후 동학은 장 접주의 장남이 이어받아 제2대 남해동학 접주로 동학 활동을 더욱 발전시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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