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우 기고◀ 백상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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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혜원 기자
  • 승인 2020.06.01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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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선도와 흥선도

창선도(昌善島)는 법정 16리(행정 32리)가 있는 넓은 면적을 가진 면으로, 남해군으로 편입된 것이 올해로 115년이 되었다. 역사를 살펴보면 삼국시대에는 가야에 속하였으며, 신라의 삼국통일로 병합이 되었지만 신라 말기에는 후백제 견훤의 지배하에 있었다.

신라말기 왕권 다툼으로 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서 지역의 호족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날 때 강주를 차지한 왕봉규의 지배하에 있다가 왕건에 패배하여 고려에 복속되었다. 명칭은 삼국시대에는 유질부곡(有疾部曲)이었으며 고려 때에도 그대로 유지하다 현종 때에 진주목 창선현(彰善縣)으로 개명을 하였다. 

그 후에 충선왕이 왕의 이름과 비슷하다하여 흥선현(興善縣)으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왜구의 침탈로 인하여 사람과 물산이 없어지고 형식상 직촌으로 남아있었다. 조선조에서 흥선도, 창선도리, 창선리에서 남면 창선리와 적량리로 이름이 바뀌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에 따라 남해군으로 이속되었다.
유질부곡은 고려사 지리지에는 고구려의 유질부곡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주변 현의 기록으로 보아 잘못된 것으로 주장하는 설과, 기록을 그대로 인정하여 고구려 남진정책으로 내려온 유민들의 주거지라고 주장하는 설이 있다.  

고려는 몽고의 내정간섭으로 스스로 군사를 키우지 못하여 전 국토가 왜구의 침탈에 무방비 상태에 있었기에 주요 도서지역은 왜구의 소굴이 되어 있었다. 남해와 창선은 고려 우왕(1383) 때 관음포 대첩으로 정지장군이 왜구를 물리치자 다시 사람들이 드나들며 농사를 짓게 되었고, 공양왕이(1390) 적량만호를 두어 지키게 하였지만, 조선조 태종실록 기록을 보면 만호를 차견하였으나 군인과 병선이 없어 혁파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세종실록에는 “남해와 거제 두 곳은 왜적이 지나다니는 길로 남해 적량과 노량에는 병선을 두어야 하며 목책을 설치하여 농민을 보호하여야 한다.”는 기록과 세종2년 “남해와 창선은 개간한 토지가 많아 부근 고을의 인민들이 몰래 들어가 농사를 짓는데 변을 당할까 염려가 된다. 전지가 많은 곳은 목책을 설치하거나 토성을 쌓아 백성들이 무기를 들고 들어가 농사를 짓게 하고, 망을 보면서 변고에 대비하며 밤에는 성에 들어가 굳게 지키며 부근 항구의 병선의 수호를 받게 하라. 그리고 전지가 적은 곳은 경작을 금지하라”는 기록으로 보아 적량성이 축조 되었지만 목책과 토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성종21년(1490)에 적량성은 둘레가 1182척으로 축성을 끝냈으며 성안에는 물이 없다고 하였다. 

남해와 창선은 같은 행정구역 안에 있지만 지나온 역사는 다르다. 삼국사나 고려사지리지에서 남해는 바다 가운데 섬을 신라 신문왕이 전야산군으로 이름을 지은 반면, 창선도는 고구려의 유질부곡이었다고 적고 있으며, 남해군은 하동, 곤명과의 통합분리를 반복하였지만 창선도는 진주 사천과 관계를 계속 유지하였다.

창선도는 진주목의 속현이었고 월경지의 직촌이었다. 참고로 속현과 월경지에 대해 살펴보면 속현은 고려 이전에 지방호족간의 지배 예속관계가 반영된 편제로 신분적 질서 위에서 이뤄졌으며, 읍사를 중심으로 향리가 관장을 하고 고려시대에는 5일에 한번 주읍에 가서 명을 받고 통치를 위임받았다. 중기 이후에는 감무를 파견하거나 통합하여 직촌제로 점차 감소하였으나 토착세력들의 반대로 혁파를 하지 못하고 조선 중종 때까지도 잔존하다가 17세기 이후에 주현으로 승격하거나 면으로 개편하였다.

월경지(越境地)는 비입지(飛入地), 비지(飛地), 두입지(斗入地) 등으로 불리는 곳으로 군현의 행정단위 소속영역을 벗어나 타 행정구역을 넘어가 있는 곳으로 후삼국 시대부터 나타난다. 행정구역의 신설, 개편, 조정 과정에서 나타나거나 재난이나 전란으로 주민들을 이주 시킬 때 생겨난다. 1906년 행정구역개편으로 없어졌으나 1914년에 와서야 완전 소멸되었다.
창선도의 중심에는 섬 안으로 들어와 있는 동대만이 있으며, 동대만(東大灣)은 동대리(東大里)가 생긴 후에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비교적 근래에 생긴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 동대만을 백과사전에서 찾아보면, 경남 사천시와 남해군 창선도 사이에 있는 만이라고 설명이 되어있는데, 이는 만의 입구나 만의 한 부분이 남해군과 사천시에 맞닿아 있다는 뜻으로 생각이 드는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창선면의 주산인 대방산에서 속금산, 연태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의 동쪽에 있는 큰 마을이 동대리이며, 서쪽에 있는 큰 마을이 서대리(西大里)이다. 만의 입구는 창선대교가 있는 단항과 가인리의 언포, 식포마을을 잇는 곳으로 대략 폭은 2km,길이는 5km정도의 만으로, 사천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곳이다. 이는 바로 잡아야 한다.  
창선도가 흥선도로 이름이 바뀌는 과정에서 동대만을 기준으로 두 개의 섬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생각이 되며 이는 범해록이나 왕조실록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허목의 범해록에서는 “1638년 음력 팔월 스무하룻날 삼천포의 옛 진을 떠나서 새벽에 창선도에 배를 대었는데 주변에는 고기잡이배의 불빛과 소금밭의 연기가 가득하다. 섬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만이 깊이 들어가 해안선을 이루었는데 동쪽은 흥선(興善)이라 하고 서쪽은 창선(昌善)이라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진주의 창선(昌善)과 흥선(興善)의 두 섬은 서로 맞닿아서 목마가 왕래하면서 살기 때문에 긴요한 목장이다.”(중종38.1543년)

창선도의 목장은 흥선목장으로 불리었으며 세종 19년(1437)에 목장을 설치하고 세조 3년(1457)에는 섬이 황폐화 되어 점마를 하여 말을 다른 곳에 나누어 주고 수년간 묵혀두게 하였지만, 고종 때까지도 목장 둔세를 받은 것으로 보아 목축은 계속된 것으로 보이며, 목장지를 농토로 개간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도 있었다.     
200년 전 진양읍지에는 남면에 속하는 창선리와 적량리 2개 리가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 유래를 보면 창선리(昌善里)는 창선도를 대표하는 이름이었으며, 유질부곡의 이름이 병이나 고통이 있다는 의미가 좋지 않아, 좋은 것이 널리 번창하라는 뜻으로 바꾼 것으로 추정한다. 창彰(나타나다), 흥興(일어나다), 창昌(창성하다)은 비슷한 뜻을 가진 글자이다. 거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창선도의 중심부에 있던 마을(지금의 수산리를 중심으로 상죽리와 상신리 지역)은 몇 개의 마을로 나눠진 것이다. 

창선도는 지형이 섬 둘레에는 농사를 지을 토지가 넓게 펼쳐진 곳이 없다. 오직 창선목 지역이 동대만으로 배를 타고 들어와 쉽게 접근할 수가 있고, 작은 고개만 넘어가면 남해의 지족과 거리가 지척간이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동여도에는 흥선으로 나와 있고 지금도 면의 중심지이다.
진양지(1662)에는 창선리의 호구는 381(남154구, 여184구)로 세금을 내는 농토는 전 9결52부1속이며 수전 32결11부9속이었다.  

적량리(赤梁里)는 적량(赤梁)이라는 이름이 지어진 것이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기록에 남아있는 것은 고려 말 공양왕(1390년)이 적량만호(赤梁萬戶)를 설치하였다는 것이다.  
전해오는 이야기는 아침 해가 뜨면 성벽이 붉게 변하여 적량이라 했다하나, 처음 이름이 지어질 때는 성이 없었으니, 붉게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볼 수 있는 나루라는 의미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조선 태종(9년) 때의 경국대전에는 “형조의 장금사(掌禁司)가 문관(門關), 진량(津梁), 도로(道路) 등의 일을 맡는다.”고 했는데 진량은 나루를 의미하며 지금의 항구나 포구이다. 량(粱)자가 들어간 지명은 노량(露梁), 구라량(仇羅梁), 가배량(加背梁), 견내량(見乃梁), 사량(蛇梁) 등이 모두 같은 의미이다, 

적량진은 지족진 20리, 창선목 10리에 있으며 진하에 3동 130호구가 있다. 진주목 읍지에는 남 110리에 적량리의 석성이 있는데 둘레 1182척, 너비405척, 길이 407척이며, 전선1, 병선1, 사후선2, 감관 1명, 노병사 145명, 사수 28명, 화포수 10명, 포수 34명, 계217명이 있다고 하였으니 그 규모를 추정할 수가 있다.   
적량과 같은 이름을 가진 곳이 하동군과 여수시에도 있다. 여수시의 홈페이지에는 적량부곡은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의 특수행정구역으로 삼일포항 동쪽에 있으며, 황토가 많아 붉말(붉은 마을)이라 불리었다. 적량의 군장(軍藏)에서 수군을 창설하여 창선도에 이동하여 주둔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적고 있지만 실증된 것은 아니다.

적량은 남해안으로 들어오는 왜구를 첨망하고 물리치는 전초기지로서 고려 때부터 이어져 왔으며 주둔했던 군장들은 왜구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사천시에 있는 대방진굴항도 진주 병마절도사가 창선 적량 첨사와의 군사적 연락을 위해 만든 곳으로 사천으로 들어오는 왜구를 방비하는 곳이 적량임을 알 수가 있다  

창선도는 지금도 남해읍보다는 사천시의 삼천포가 가까운 생활권이다. 조선시대에는 주요 목장으로 종마를 두고 어린 말을 거제도 목장으로 보냈고, 대마도주가 조선왕실에 옮겨와 살게 해 달라고 요청한 해상무역의 주요기지였다. 이는 늑도의 유적을 보더라도 옛날부터 이 지역이 해상무역의 중심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에 1진으로 온 대마도주 소요시토시의 수군이

마지막으로 남해왜성과 창선에 숨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고려 때 국사를 보관할 정도로 안전한 곳이었는데 진도로 국사를 옮기기 전에 보관한 곳은 어디였을까? 그 곳을 찾아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될 것 같다. 창선의 이름처럼 건강하고 좋은 일이 많이 생겨나고 주민들이 건강하게 장수하는 유서 깊은 힐링의 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가인리의 공룡화석산지가 있는 해안가를 따라서 공룡과 도마뱀의 발자국을 찾으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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