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이로 ‘예순’인 1961년생, 이 나이를 두고 성인(聖人) 공자는 ‘무엇을 듣더라도 귀에 거슬리는 것 없이 순조로운 나이’라는 뜻으로 이순(耳順)이라고 일컬었다.
누구랄 것 없이 중하지 않은 목숨이 있겠느냐마는 나이 예순을 맞이한 이시영(호적명 이의영) 교사는 유독 각별한 생이다. 위로 누나만 셋인 사남매 중 막내이자 장남으로 삼동 은점마을에서 나고 자란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떠나는 아픔을 겪었다. 고등학교로 돌아갈 형편이 되지 못하는 가난을 겪다가 누이들이 십시일반 학비를 모아 준 정성으로 대학을 갔고 부산시에서 자체적으로 시행하는 사립중등교사자격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곧장 학교로 가는 대신 4년간 금융회사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그 와중에 교통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 남해군으로 돌아왔다. 그때가 1990년. 배운 지식을 활용할 일자리는 지역신문이었다. 
그렇게 지역신문 1세대로 8년을 근무하다 1998년 모교인 남해고등학교에 국어선생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공부 잘하는 기술보다는 인간답게 사는 인성을 가르치고자 했던 그답게 보람과 감동도 컸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2004년, 마흔넷의 창창한 나이에 뇌종양 판정을 받아 수술하게 되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으나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시영 선생은 “내 성격인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어떤 상황이 닥치면, 닥치는 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내게 닥친 상황에 따라 처신을 하고 살 뿐”이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힘들다는 뇌종양 수술을 잘 이겨내고 다시 괜찮아지나 싶은 일상에 또 한 번 폭풍이 몰아쳤다. 이번에는 간암이었다. 2018년 2월 첫 간암 수술을 하고 2019년 12월 수술한 부위 반대편으로 하나 더 종양이 생겼다는 판정을 받아 2차 간암 수술에 들어갔다. 한 번도 힘든 수술대를 세 차례나, 추호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 힘든 암을 세 차례나 겪게 된 것이다.

▲ 원치 않았던 시련과 아픔…날 살린 건 아내의 지극정성
이 고통의 끝 또한 분명히 있다는 믿음으로, 다시 세상 밖으로

누구도 원치 않을, 원망으로 지샐 법한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아내 이미아 씨(전 상주중 교사)의 지극정성이었다. 이시영 선생은 “부인이 날 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침에는 각종 볶은 곡식으로 만든 미숫가루로 속을 편안하게 해주고 케일, 양배추, 방울토마토, 키위, 사과, 포고버섯을 기본으로 한 샐러드에 플레인요거트와 감식초, 트러플 오일로 만든 드레싱소스를 곁들여 준다. 채식 위주의 건강한 식단을 2004년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해주는 아내에게 절로 경외감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암과의 투쟁에서 이겨낼 수 있었던 또 하나의 비결로는 ‘자신을 믿어주는 것’과 ‘걷기’를 꼽았다. “아프면 너나없이 약해지기 마련이다. 통증이 심하면 심할수록 이 지옥이 끝나지 않으면 어쩌나 겁이 나는 게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꼭 말해주고 싶다. ‘자신을 믿어야 된다’고. 자신을 믿고 자신을 두려움 속에서 끄집어내어 세상 밖으로 ‘걸어나가도록’ 해야 한다고 꼭 말해주고 싶다. ‘걷기’야말로 가장 무리를 주지 않는, 부작용 없는 행복한 약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는 이시영 선생.

그런 그였기에 최근 남해군보건소에서 실시한 ‘이달의 걷기왕’에서 595명 중에 무려 2등의 영예를 안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의 일과는 어떻게 될까. 코로나19겸 병 휴직으로 쉬고 있는 그는

아침 7시 좀 넘어 일어나 미숫가루와 샐러드를 먹고 오전 11시 반쯤 아침 겸 점심으로 한식 식단을 먹은 뒤 오전 코스는 주로 ‘남산공원’을 돌고 오후 세시 경 점심 참을 먹고 아랫동네 커피 한잔 마시러 갔다가 일곱 시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오동마을을 돌아 남해대학 운동장까지 갔다가 거의 밤11시까지 걷다가 오는 게 대개의 일상이다. 그렇게 ‘걷기’로 건강을 충전하면서 보이는 생활 속 불편들, 이를테면 공원의 떨어진 그네 줄에 대한 위험 신고, 도보에 튀어나와 위험하게 하는 돌을 다른 곳으로 옮겨 두는 등 생활 속에서 행할 수 있는 봉사를 찾아 조용히 실천한다. 이시영 선생은 “욕심을 버리면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초심을 버리고 눈앞의 이익에 눈멀어 시류에 편승해 명리(名利)만 쫓는 행태는 매 순간 멀리하려 한다”며 “사람은 자기가 산 만큼 평가를 받기 마련인데 자꾸 이 자리, 저 자리 탐하다 보면 결국엔 탈이 나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이어 자식 교육에 대해서도 “요즘은 성적과 성과에 너무 목을 맨다. 시험 잘 치고 오면 자기가 방긋 웃고 올 게 뻔하고 못 치고 오면 울상인데 울상으로 온 자녀에게 ‘너 시험 잘 쳤느냐’고 따져 묻는 건 잔인하다. 그건 부모 만족을 자식에게 찾으려 드는 욕심일 뿐”이라고 말했다.

두 아들에게 ‘불의에 눈 감지 말라’고 가르쳐 온 그는 20년 넘는 세월 동안 이어온 교육 봉사를 내려놓고 이제는 주위를 돌아보는 성찰로 유유자적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웃들과 커피 한 잔, 빵 한 조각 나누는 마음으로 여생을 봉사하며 살고 싶다는 이시영 교사는 오늘도 걷는다. 
그저 묵묵히 기타 줄을 튕기며, 수필을 써 내려가며 때론 바리스타처럼 커피 한잔을 내리는 것으로 그렇게 인생 2막 새로운 60을 바라보며 즐거운 삶을 거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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