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매일 마주치는 이웃이라도 가끔은 일상과는 다른, 그 사람들의 서로 다른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다. 이 때 우리는 이들을 ‘낯설다’고 느낀다. 
이런 눈으로 보면 평소 아무 특징없이 익숙하다고 여겼던 친구나 이웃,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놀라운 능력이나 훌륭한 덕성을 갖추고 빛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남해로 귀촌한 설치조각 예술가 문성주 씨를 찾아 갔을 때 밀려 든 느낌이 이와 비슷했다. 이런 낯선 상태로 남면 상가리 임진성 앞 외딴 곳에 설치조각 작업장을 차린 문성주 씨를 만났다. 다른 일을 하는 사람과는 달리 예술가라는 그의 직업(?) 때문에 이런 낯선 느낌은 신비롭다는 색채를 더한다.   

남면 임진성 입구 도로에 축사 건물과 창고, 주택이 소나무 숲 야산을 배경으로 외따로 앉아 있다. 미술가 문성주 씨가 지인의 소개로 찾아낸 곳, 그의 미술 작업장이자 집이다.
외따로 떨어져 힘들지 않느냐고 물으니 가까운 곳에 인가가 없어 오히려 작업하기 편하다고 한다. 미술이라지만 도화지에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는 회화가 아니라, 돌을 깎거나 다듬기도 하고 쇳조각이나 플라스틱을 자르고 이어붙이는 설치조각이라서 작업할 때 글라인드나 소형드릴, 연마기, 용접기 등 기계도구 소리가 요란하기 때문이다. 또 외따로 있어서 예술가로서 자유로운 면도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남해의 풍경과 분위기가 좋았다. 앞서 함양군에 자리를 잡을까 알아보다가 아는 분이 남해 이곳을 소개해 와 보곤 곧바로 여기로 오기로 마음먹었다.” 

지난 2월 남해로 귀촌해 설치조각 미술 작업을 하고 있는 문성주 씨는 1964년생으로 부산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하고 1993년 이탈리아로 유학을 갔다. 그곳에서 9년 동안 설치조각미술을 연구하면서 작품활동을 했다. 이탈리아 활동 중에 이탈리아와 노르웨이, 독일 등지에서 열린 ‘국제조각 심포지엄조각가 작품전’에 출품해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한 미술가로 호평을 받았다. 특히 2001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베로나 국제조각심포지엄에서는 영예의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2005년 한국에 들어온 후에도 문성주 씨는 부산 조각회와 소통전 등 수차례의 개인전과 그룹전, 작품설치 등 국내 활동과 국제적인 미술활동도 병행해서 왕성하게 해 왔다. 최근 2016년에는 거제시청 전시실에서 작품설치 활동을, 2018년에는 부산 이젤(EASEL)갤러리에서 개인전도 열었다.
“내 자랑은 아니지만, 외국에서는 활동을 인정받아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다.”는 문성주 씨. “외국에선 전시 서류를 내면 떨어진 곳이 거의 없었는데 한국에서는 전시 서류를 내도 붙는 곳이 거의 없었다”며 허허로운 웃음을 날렸다. “사람들이 설치조각에 대해 너무 낯설고 어렵게 느끼는 것 같아 아쉽다”고도 했다.  

▲ 그의 작품세계 ‘홀로 고독을 즐기는 아름다운 유희’ 

문 씨의 설치 작품들이 사방 벽을 따라 쭉 진열돼 있는 창고 안에서 대표적인 작품의 특징에 대해 설명을 듣다가 뭔가 작품들 하나하나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머리를 스쳤다. 조각의 재료인 돌이 고흥석이나 벼루석, 사암, 황토대리석, 청오석 등 희귀한 것들이어서 그렇기도 했지만 그런 돌을 찰흙처럼 주물러서 빚은 듯한 자연스러움과 그 돌들에 섬세하게 새겨진 선과 명암들, 그리고 그런 표현을 통해 퍼져 나오는 고대적 엄격함과 미래적 자유분방함이 가지런하게 어우러져 있는 격조에 놀랐다. 설치미술에 문외한이지만 유심히 볼수록 ‘이거 보통 실력이 아니다’는 느낌이 더 강렬해졌다. 그때 문성주 조각가의 예술관이 궁금해졌다.  

“예술요? 내가 좋아서 혼자 상상하고 이것 저것 도전해 보는 거 아닐까요?” 
문성주 조각가는 자신의 작품전 브로셔 어딘가에서 채록한 글을 보여주었다. 그 글귀는 이랬다. ‘나는 상상한다. 인간의 기억 이전 그 이전의 이전과 인간의 기억 이후 그 이후의 이후 …’
문성주 조각가의 예술관과 관련해 부산 이젤갤러리 전시를 평가했던 정형탁 독립큐레이터는 문 씨의 전시회를 ‘홀로 고독을 즐기는 아름다운 유희’(The beautiful joy amusement of solitude)라고 평가했다. 들을수록 더 아리송해졌다.  

문 조각가는 창고 한 켠에 있던 한 팔 길이의 작품을 집어들었다. “이게 뭐 같아 보여요?” 청록색 아크릴 조각들을 구부린 철근에 붙여 넣은 게 꼭 커다란 거미나 딱정벌레 같다고 했더니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이건 옆에서 본 사람의 얼굴이기도 하다”고 했다. 그제서야 뭔가가 조금 이해됐다. 문성주 조각가는 하나의 작품형상에 사람이기도 하면서 동물이기도 한 ‘동시성’을 담았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여기에 머물지 않고 문 조각가는 동물의 형상에 사람을, 혹은 원시 갑충이나 화석에 컴퓨터나 기계의 형상을 담는 등 생물과 무생물을 혼융하고 고대 과거와 미래를 이어붙이면서 생명체 분화 이전의 근원을 펼쳐 보이고 싶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울러 문 조각가는 무생물과 식물, 동물과 정신적인 생물 등을 모조리 평등과 근원 속으로 귀일시켜서 보려고 시도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설치미술을 어려워하거나 무관심할 수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문 조각가는 “설치미술 뿐 아니라 예술작품을 그냥 ‘있는 그대로’ 봐 줬으면 좋겠다. 보이는 그대로 보고 느껴지는 그대로 느끼고 향유할 수 있는 그대로 향유하면 그게 예술 아니겠나”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문 조각가의 작업장을 떠나면서 이제 막 그를 조금 알기 시작했을 뿐이라는 느낌이 스친다. 마치 첫 마디도 못 건네고 먼 발치에서 그의 실루엣만 보다가 그냥 돌아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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