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닭 우는 소리와 함께 희미하게 창이 밝아오면 헝클어진 머리에 때 묻은 수건 동여매고 밭에 나가 이슬에 젖은 몸으로 돌아와 밥을 지으시는 모습 보며 어머니는 그런 줄로 만 알았습니다. 
이빨 빠진 낡은 대소쿠리에 검은 보리밥 한 덩어리, 쉰 날 고구마 한 두뿌리와 시래기 국을 부뚜막에 걸터앉아 끼니를 때우시는 모습 보며 어머니는 그런 줄로 만 알았습니다. 

[군내(郡內)의 시장 날] 
여명(黎明)의 하늘이 밝아오면 시장어귀에 나가 팔려오는 곡식자루를 받아 이고 와서 싸전(廛)에 주고 되 밑으로 받은 잔 돈 대 묻은 가재수건에 똘똘 말아 치마 속 큰 주머니를 달아 그 속에 넣고 덜렁덜렁 달고 다니시다가 비바람불고 북풍한설 몰아치면 대문밖에 나오셔서 아들 손에 쥐어 주시며 오늘은 꼭 차타고 가라하시던 어머니 모습 보며 어머니는 그런 줄로 만 알았습니다. 

어머니께서 교복을 세탁하려다 우물가에서 불러 갔을 때 제 바지주머니에서 꺼낸 돈을 주시며 이게 무슨 돈이냐고 물으시기에 엊그제 어머니께서 비바람 불 때 차타고 가라며 주신 돈이라고 말하자 그럼 그날도 그 비를 맞고 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학교에 갔단 말이냐 … 어머니와 저는 껴안고 한참을 울었던 모습 보며 어머니는 그런 줄로 만 알았습니다. 

이른 아침 시장에 나가 하루 종일 일하시고 시장어귀의 장터 국수 한 그릇을 사 드리지 못하고 허기진 배를 따라 흘러내리는 때 묻은 광목치마를 한 손으로 붙잡고 돌아와 부엌 앞 우물물을 퍼 올려 큰 대접에 붓고 사카린 대 여섯 알맹이를 넣고 새끼손가락으로 휘휘 저어 꿀꺽 꿀꺽 마시고 대청마루에 코골며 잠들었다가 마을 어귀의 부추 밭에 내일 새벽시장에 내다 팔 부추를 베러가는 뒷모습 보며 어머니는 그런 줄로 만 알았습니다. 

찌는 듯한 무더운 여름 어느 토요일 오후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고 먹구름이 밀려와 장대같이 쏟아지는 소나기를 맞고 귀가하여 부모님께 학교에 다녀왔습니다 인사를 드렸더니 얼굴에 무슨 먹물이냐 … 
주경야독으로 한학을 공부하셨던 아버지께서 쓰다 남은 벼루의 먹물을 빛바랜 모자에 바르고 다녔는데 그 먹물이 얼굴로, 목으로 흘러내린 아들 모습을 보신 어머니께서 다음날 책상 위에 올려놓은 새 모자를 보면서 어머니는 그런 줄로 만 알았습니다. 

엄동설한에 시냇가에 나가 맨손으로 빨래를 하시고 온갖 잡다한 가사와 농사일로 항상 손톱 밑에 끼어 있는 그 검은 손톱이 닳아 깎을 손톱이 없어도 어머니는 그런 줄로 만 알았습니다. 
뇌리에 깊이 담아 온 날이 오면 밥상에 육 고기를 올려놓으시고 아예 쳐다 보지도 않으시며 육 고기를 드시면 배탈이 난다는 말씀에 어머니는 그런 줄로 만 알았습니다. 

군대생활 중에 마지막 휴가를 받아 동생이 공부하는 부산 대신 동 어느 하숙집 옥상 가건물에 밤 11시경에 문틈 사이로 가느다란 불빛이 새어 나오는 작은 방문을 살며시 열어보니 양철물통을 놓고 그 위에 스티로폼을 깔고 앉아 볼펜을 들고 졸고 있는 동생의 모습을 본 나는 동생 학비를 조금이나마 마련해 보려고 육군 만기제대 4개월 남겨놓고 온 종일 대포소리가 하늘을 가득 메우는 상하의 나라, 전쟁의 나라 월남으로 부모님도 모르게 떠났던 아들을 꼭 껴안으시며, 아들아! 내 아들아! 다친 곳 하나 없이 건강하게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 왔구나. 
아들의 얼굴을 만지며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 양손으로 뿔시며 가슴속을 파고드는 이 기쁨 달랠 길 없어 둘째 아들의 등에 업혀 한 마리 나비가 되어 너울너울 춤추시는 모습 보며 어머니는 그런 줄로 만 알았습니다. 

검은 뿔테 돋보기안경 쓰시고 바늘 한 뜸 한 뜸에 눈물 머금은 희미한 눈으로 밤늦게까지 헌 옷을 기워 때 묻은 무명보자기에 싸서 아들아 서울 가걸랑 윗사람 말 잘 듣고, 배 굶지 말고, 돈 많이 벌어서 잘 살아야 한다, 하시며 마을 어귀 논둑에 우뚝 서서 때 묻은 광목치마 뒤집어 눈물 훔치시는 모습 보며 어머니는 그런 줄로 만 알았습니다. 

어머니께서 태어나신지 3개월쯤에 외할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셔서 어머니 태어나신 날을 몰라 생전에 어머니 생신을 차려드린 기억이 없으며, 아버지와 결혼하고 보니 시어머니께서 막내삼촌 다섯 살 때 세상을 떠나셔서 어린 막내삼촌을 어머니께서 키우셨다는 막내삼촌을 낯설고 물설고 말씨마저 설은 타국 일본에 두고 온 서운함과 그리움에 일본에서 귀국 시에 가지고 온 벽시계가 시간을 알리는 방울소리를 들으면 낯선 타국에서 힘겨운 삶을 외롭게 혼자 살고 있을 막내삼촌을 걱정하시며 눈시울 적시는 어머니 모습 보며 어머니는 그런 줄로 만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줄로 만 알고 자란 지지리도 못난 칠순이 넘은 둘째 아들. 땀과 눈물로 범벅된 모습으로 삶의 높은 계단을 기어오르느라 건설현장 대모도(잡부), 남대문 시장 점원, 경향신문보급소 총무, 학생들 과외지도 등 그리고 때늦은 공무원으로 힘겨운 객창생활 55년을 맞이하는 천하의 불효자는 밀려오는 그리움과 서러움에 눈시울 적시며 어머니께서 쓰셨던 돋보기 안경을 쓰고 비 내리는 객창가에 멍하니 서서 가슴 깊이 묻어주고 떠난 어머니의 큰 사랑, 큰 은혜, 큰 이해와 용서에 혼을 날립니다. 

생전에 단 한 번도 입술 밖을 떠나지 않고 입속에서 맴돌았던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말 모두 가슴 깊이 담아 ‘어머니 사랑합니다.’ 어머니의 큰 혈관에서 맑은 피를 수혈하고 튼튼한 뼈를 도려내어 인간으로 태어난 볼초소자는 어머니께서 일러주신 역지사지(易地思之)의 큰 가르침 잊지 않고 뇌리에 묻고 갑니다.    

뼛속까지 아려오는 가난으로 사계절이 변하여도 오직 몸빼 하나로 힘겨운 삶을 살다 홀연히 곁을 떠난 어머니, 우리 어머니. 칠순 넘은 둘째 아들의 컴퓨터 방 가장 높은 곳에 모셔 놓은 아버지 환갑 때 찍은 보모님의 흑백사진을 보며 어머니가 보고 싶어 고개 숙여 흘러내리는 눈물 가슴에 가득 담고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대명절인 설날이 오면 아버지께서 장작을 팔아서 사 오신 나일론 양말을 선물로 받았을 때 그리고 우리 형제 한겨울 이른 새벽에 방이 추워 이불을 서로 끌어 당겨 가며 선잠을 잤던, 행복하였던 기억과 아름다운 추억 속에 남아있는 많은 날들을 끌어 당겨 보려 하지만, 다리가 불편하셨던 형님과 아버지 밥상 머리에 앉아서 아버지가 남기시는 한 톨의 하얀 쌀알이 보이는 밥 한 숟갈이 먹고 싶었던 막내 동생은 아버지께서 밥그릇을 물에 부어 드시면 돌아 앉아서 울었던 착한 막내 동생마저 곁을 떠나보낸 생각을 하면 너무나 서글픈 추억 속에 가슴 아려 옵니다. 

어머니께서 곁을 떠나신지 3년 후에 못난 아들의 꿈에 아들아 살기 많이도 힘들지 너는 내가 도와주마 하시는 말씀에 어머니를 붙잡으려 손을 내밀다 꿈을 깨어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보니 갈색 자켓 입은 어머니는 어디론지 떠나시고 … 불초(不肖)한 소자는 이불에 얼굴을 묻고 목이 메이도록 많이도 울었습니다. 엊그제는 어머니가 아들 보고 싶어 아들의 꿈결에 오셔서 칠순이 넘은 아들 모습 보시면 너무나 마음 아파 하실까봐 명의(名醫)를 찾아가서 얼굴 여기저기 돋아 난 검버섯을 모두 뽑아버리고 밝은 미소 지으며 어머니의 흑백 사진 앞에 우뚝 서서 한참 서 있었습니다. 이렇게 튼튼한 몸과 건전한 마음을 가진 불초소자의 늦은 나이에 새롭게 다가오는 미래에는 행복한 꿈을 꾸며 꽃길만 걸어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어머니 고맙습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어머니께서 곁을 떠나신 후 강산도 여러 번 바뀌어 세월이 흘러갈수록 노고지리 하늘을 주름잡는 어느 따스한 봄날 파릇파릇한 보리밭 사이로 아지랑이 되어 되살아나는 어머니 생각. 훗날 어머니께서 부르시면 부초같은 객창의 나그네 삶을 청산하고 어머니께서 가슴깊이 묻어주고 가신 역지사지(易地思之)의 큰 뜻 받들어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살다 비 온 뒤에 하늘을 가로지르는 아름다운 무지개를 타고 봉황의 큰 날개 짓으로 한 마리 도요새가 되어 하늘 높이 더 높이 날아서 미리내 긴 다리를 따라 어머니 곁에 가렵니다. 
어머니! 보고 싶습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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