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창문으로 꽃잎이 날아들었다. 이제 꽃도 지는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떨어지는 꽃잎을 붙들고 한숨짓고 있을 수만은 없다. 자연의 시간표대로 지금 행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신문사로 걸려온 한 통의 전화에 닿은 인생 이야기 같은 것. 이동면 다천마을에 사는 93세 하봉수 독자의 전화다. 
“거기 남해신문사요? 내가 당년 나이 구십 삼세거든. 지금 내가 트랙터를 몰고 논 갈러 가거든. 곰곰 생각해보니 이 나이에, 구십 셋에 트랙타 몰고 논 치러 가는 사람은 하봉수 외에는 별로 없을 것 같아. 그래서 내가 전화를 했소. 와서 사진 좀 찍어 보소”
떨어진 꽃잎은 살며시 내려두고 어르신이 계시다는 다천마을 논으로 발길을 돌린다.
정갈한 논 한가운데 정정한 어르신이 트랙터를 타고 있다. 

“이래 봬도 내가 6ㆍ25참전유공자요. 일개 중대가 싹 침몰했을 때도 용케 살아남았제. 그때 실탄이 관통했으모 죽는 건데 척추에 박히는 바람에 내가 살았지. 하늘이 구해준 목숨이라. 내가 살아온 역사를 말하자면 말도 못하네. 금년 내 나이 구십 삼세니까 28년생이제. 그런데 늦게 신고를 해서 호적상으로는 29년생이야. 이 나이에 멀쩡하게 운전해서 논을 치는 것 자체가 내 건강이 여전히 좋다는 뜻이겠지. 자랑 한번 하고 싶었어. 남해신문이 이런 것도 보도를 해야 안 되겠나 싶어서 전화했제”
카랑카랑한 목소리 뒤에 숨겨진 이야기 봇짐이 가득이셨다. 죽을 고비를 몇 차례나 넘었다는 하봉수 어르신은 열일곱에 일제 강점기 징용을 살았고 스물셋에 군에 입대해 6ㆍ25를 겪고 거기서 총알을 맞았다고 한다. 무장공비토굴작전에 투입됐을 때 보았던 ‘형과 동생의 상봉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눈시울이 뜨겁다는 그는 국가보안법에 묶여 형무소에서 온갖 고초까지 겪은 근현대사의 살아있는 증인이셨다.

▲ “그래도 목숨이 붙어 있으니 달리 도리가 없다”

아들은 없고 딸만 넷이라는 어르신에게 ‘참말 좋으시겠다’는 부러움 담긴 인사를 전하자, 어르신은 이내 담담히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신다. 
“딸 셋은 부산서 살고 하나는 제주도에서 살아. 나도 차마 말 못할 아픔이 있어. IMF 터졌을 때 자식 때문에 빚도 많이 지고 고생도 참 많았어. 많던 논밭 죄 잃었지. 그래도 뭐 어쩔 도리가 있나. 목숨이 붙어 있으니 도리 없이 나는 나 대로 살아가야지…”

차마 내가 겪어보지 못한 세월,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어 말문을 돌려본다. 식사는 어찌해 드시는지 여쭤보니 “할매(아내)가 팔십 칠세인데 치매에 걸려 갖고…고생이 많다. 보훈처에다 전화해 자초지종을 설명했지. 고맙게도 간병인을 보내주기로 했는데 그마저도 코로나바람에 아직 한번도 못 왔지”

받들 봉, 지킬 수를 이름으로 쓴다는 하봉수 어르신은 말문을 찾지 못하는 내게 “신문에 낼라모 큼직하게 내라”며 농을 쳤다. 이어진 이야기는 더 놀라웠다.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의 취임식에 초대돼 갔을 때 너무 행복해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는 것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위한 첫 촛불시위가 있을 때 나이 구십에 서울까지 올라가 현장을 보고 감격했다는 이야기, 심상정 정의당 대표가 남해서 본인을 업어줬던 일 등이 인생의 기쁨이었다고 하셨다. 자유당 시대부터 선거때마다 참관인을 빠진 적이 단 한 차례도 없다는 이야기 등등.
하봉수 어르신은 “죽다 살아나온만큼 그냥 살아선 안 되지. ‘정의롭게 살자, 예의를 지키자, 약자를 돕자’ 이 세 가지를 인생철칙으로 삼고 살았다”며 “자네나 나나 주인 아닌가. 대한민국 모든 공직자는 주인의 머슴이네. 머슴의 잘잘못을 탓하기 전에 주인으로서의 책무를 완수해야 해. 올바른 주권행사가 그 책무의 시작이라고 난 생각하네. 맨날 지역 찾고 일가친척 찾아 표 주는 게 주권행사가 아니라 훌륭한 인물을 찾고 행동하는 양심을 찾아야 해”라고 말씀하셨다. 

끝으로 창간 30주년을 맞는 남해신문에 대해서도 당부를 잊지 않으셨다.
“30년 동안 걸어오면서 많은 고생도 하고, 행복도 있었을 것이라고 보네. 딱 하나 부탁이 있어. 난 한겨레신문을 최고로 치거든. 나한테는 신문이 법이야. 무엇보다 공정해야 하네. 공정한 신문 만들기에 최선을 다해주길 바라고… 임직원 모두의 건강을 기원하네”

하봉수 어르신, 자신이 할 이야기를 일목요연하게 메모한 필체는 강단이 넘쳤다. 그 옛날 청년 하봉수의 걸음이 어땠을까 떠올려보려다 이내 고개를 내젓는다. 지금 내 앞의 이 꼿꼿한 어른이 청년 하봉수 그대로의 걸음인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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