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성 완남해경찰서 청문감사관
정 성 완남해경찰서 청문감사관

팽현고개에서 도로를 건너 남해읍 봉성마을을 입구를 지나 내금마을 방향 야산 능선을 힘겹게 올라 서면서 양옆의 두 마을은 남해에서 유일하게 바다를 조망할 수 없는 계곡에 위치한 오지의 마을입니다. 이 산의 특징은 개인 사유림으로 등산로가 개설되어 마사토와 낙엽이 엉켜있고 숲이 우거져 야생난이 자랍니다. ‘소박한 마음’이란 꽃말을 가진 보춘화(報春花)가 개화하여 이름 그대로 봄을 알리는 식물 춘란(春蘭)으로서 자태를 뽐내는 모습이 힘든 산꾼들에게 휴식의 여유를 가져다줍니다.  

보춘화는 향은 없지만 그래도 몰지각한 남획을 방지하기 위해 낙엽을 끌어모아 덮어두고 바쁜 걸음을 재촉하면서 괴음산(槐蔭山 605m)으로 급경사를 따라 바위 능선을 치고 오릅니다. 교양·품위있는 가인·소박함·순진무구한 사랑 등 많은 꽃말을 가진 남산제비꽃, 이 꽃이 예쁘게 피는 4월 춘궁기에 북방 오랑캐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우리나라를 자주 쳐들어왔다고 하여 오랑캐꽃이라고도 불렀다고 하니 꽤나 역사가 있고 민족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함께해온 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힘들게 안착한 곳 괴음산(槐蔭山 605m)입니다. 이 산의 진행 방향 우측 아래 마을은 동·서·남 방향 모두 숲과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마치 나뭇가지에 얹힌 새집과 같다 하여 새방(鳥房)으로 부르다가 임진왜란 때 경주최(崔)씨가 피난 와서 마을을 이루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지금은 봉성(鳳城)마을로 부른다고 합니다. 
좌측 아래 마을은 외금(外金)·내금(內金)마을인데, 일제 강점기 때 금강을 조사한 결과 광맥이 있는 곳을 내금(內金), 없는 곳을 외금(外金) 이라고 전하고 있으나 유래는 확실치 않다고 하네요.
괴음산(槐蔭山 605m)은 남해읍에서 남쪽으로 보면 납산(猿山 626.7m)의 곁에서 삿갓모양 우뚝 솟아있는 산으로 멸악산이라고도 불렀다 하고 옛날에 비가 올려고 하면 이 산이 울었다 하여 괴상한 산 괴음산이라고 하나, 실제 한자 표기는 홰나무 괴(槐)와 그늘 음(蔭)으로 이 산에 홰나무가 그렇게 많은 건지? 유래도 없는 이상한 지명이 만들어져 있기도 합니다. 

괴음산 정상에서 남으로 납산(猿山 626.7m), 서쪽으로 송등산(松登山 617.2m)이 진행방향 능선에 솟아있고, 남해읍 시가지와 강진만의 비경, 지나온 망운산, 우측의 남면 설흘산과 응봉산, 광양만 바다 건너 여수 돌산도 금오산과 향일암, 고흥반도, 발밑의 앵강만과 노도, 진행방향 남쪽 금산, 그리고 좌측 강진만과 창선 대방산이 그림같이 시야를 차지합니다. 보물섬 남해의 대부분을 조망 할 수 있는 천하의 비경을 글로 어찌 기록하며 말로 어찌 성언(成言)키 어려울 정도로 표현하고픈 곳입니다. 비경이지만 괴음산에서 송등산으로 내려가다 오르기 위해 너덜지대를 통과하는데, 이 구간은 하절기 산행시 뱀(독사)이 많이 서식함으로 주의가 요구되는 곳입니다.

능선의 암릉을 따라 도착한 곳이 송등산(松登山 617.2m)입니다. 남해군 남면 당항리 마을의 북쪽에 위치하고 이동면 용소리에서 남면 당항리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광여도에 고동산 선재봉산(顧東山 船材封山), 동여도에 봉산(封山), 대동방여전도에 송봉산(松封山)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봉산이란 조선 숙종 이후 국용 목재 생산처로 이 산등성이에 소나무가 많이 서 있는 것을 어느 도사가 보고 산 이름을 송등산이라 지었다고 전해오는데, 지금은 소나무가 거의 없고 잡목들이 무성하여 송등산의 이름을 무색케 하고 있습니다.

진행방향 좌우로 호수와 같이 잔잔한 강진만과 앵강만을 봐가며 지천에 늘려진 바람난 여인·질투의 꽃말을 가진 엘레지들의 환대를 받아 가며 발아래 남해의 고찰 용문사(龍門寺)가 모습을 드러내면서 발길이 더욱 가볍게 느껴집니다. 납산 정상을 오르기 직전의 대밭과 사람이 살았던 집터 등 흔적이 있는 것을 보니 금산으로부터 봉화를 받아 망운산등 대륙으로 신속히 전하기 위해 인근에 사람이 거주해야 가능했지 않겠느냐는 나름대로의 판단도 해 보면서 옛날 선조들의 지혜가 묻어나는 현장임을 느낍니다.

큰 바위 덩어리 위에 조성된 봉화대와 정상석 납산(猿山 626.7m) 입니다. 남해군 남해읍 이동면 용소리에 위치 해 있고, 송등산·괴음산 등과 함께 1983년 11월 12일 남해군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죠. 납산은 원숭이 원(猿)자로 옛말인 원숭이 납 자를 사용하여 산이 원숭이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과 같다 하여 동국여지승람 등 고문서에도 납산(猿山)으로 부르고 있는데, 정상에서 용문사 방향으로 보면 호랑이가 누워 있는 모습이라 하여 호구산(虎丘山)으로도 혼용하여 부르고 있어, 이 산을 찾는 입산객들은 납산(猿山)으로 찾아왔는데 이정표는 호구산이라며 헷갈리는 보물섬 행정을 질타하는 이들이 많다는 점 직시해 주길 바라면서 하루빨리 국토지리원의 공식 지명인 납산으로 바로 잡아주길 촉구도 가져봅니다.

남해바다 어디서든지 특이한 형태의 바위 봉우리를 조망할 수 있는 납산(猿山), 남쪽 아래 기슭에 대한불교 조계종 제13교구 본사 쌍계사의 말사인 고찰 용문사(龍門寺)가 위치하고, 그 바로 밑에 조성된 미국마을과 화계(花溪)마을, 마을 앞 바다에 목단도(모란섬)라는 꽃처럼 아름다운 섬이 있어 그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앵강만(鸚江灣)이 호수처럼 다가오고 그속의 노도(櫓島)섬, 설흘산과 금산이 납산과 함께 정삼각형 형태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어 천하 명승지다운 모습을 연출합니다.

용문사(龍門寺)는 802년(신라 애장왕 3년)에 창건한 남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사찰로 원효대사가 지금의 금산에 보광사라는 이름으로 세운 것을 1662년(조선 현종 2년)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용문사로 이름을 바꿨다 하고 명부전에 모신 지장보살은 원효대사가 손수 조성한 것으로 전해옵니다. 또 임진왜란 당시 승병 활동의 근거지로 쓰여 훗날 조선 숙종이 수국사(守國寺)로 지정하기도 했다고 하며 호국사찰로도 이름이 높은 곳입니다. 용문사의 암자는 백련암과 염불암이 있는데, 백련암은 스님의 수행처로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용성스님과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석우스님 그리고 성철스님도 수행차 머문 곳으로 전해옵니다.

하늘, 바다, 땅이 함께하고 있는 보물섬 남해, 앵강만(鸚江灣)은 꾀꼬리 앵(鶯) 자에 물 강(江)자를 쓰고 있지만, 어원은 명확하지 않다고 합니다. 꾀꼬리가 많이 울어 눈물이 강을 이루었다는 설(說)도 있고, 주변에 있는 곳골이 꾀꼬리의 순우리말인 곳고리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앵강만 입구 서포 김만중(西浦 金萬重, 1637.3.6~1692.6,14)이 한양에서 1.045리의 거리로 귀향 와서 머물다 이곳에서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집필하고 숙종 18년(1692) 5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곳 노도(櫓島)섬, 강진만, 남해읍과 창선면의 비경이 진정 승지(勝地)가 아닌지? 하면서 앵강고개로 내려섭니다.

요즘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그곳에 가면 먹고, 잠자고, 머물고 싶은 욕망을 가지는데, 주변 여건이 이렇게 맞추어질 때 정착(定着)이라는 생각을 가진다고 하죠. 그곳이 바로 만화방창(萬化方暢)의 시기에 본 남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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