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사서 읽고 어디 둔지 몰라 찾지 못하고 그 때 감동을 가물거리는 기억으로 더듬다. 그 동안 간단명료해 보이는 권선징악적 해피엔딩은 신파조라는 생각이 잊어지지 않는다.『장한몽』의 심순애와 이수일처럼 거창하게 대동강 변을 걷지 않아도 우동 한 그릇으로 서민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희망을 안기는 뻔 한 내용을 예상하면서도 일반인의 마음을 울리는 내용은 역시 일본인 특유의 “사소함에서의 보는 큰 아름다움”을 여실히 들어 냈다. “정서가 메마른 시대, 감동이 목마른 시대의 필독서”란 책의 카피는 최근의 각박하게 흐르는 세태에 “마중물”같은 표현이다. 언젠가 아이들에게도 말했지만 겨울 새벽 아버지가 새끼 꼬는 소리도 들어보지 못한 아이들의 방에서는 늘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소리만 들린다고 필자는 요즘 젊은이들의 정서 마름 현상을 표현 한 적이 있다.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른들이 없는 마당에 사소함에서 세상의 온정을 느낄 수 있다면 참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감성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 감성을 불러 낼만 소재가 없는 것이 더 각박하다. 흔히 가난하면 인정이 많고 부유하면 인간적인 정이 부족하다고 예상한다. 은혜를 잊지 않았거나 부유함에도 상냥하며 베푸는 삶을 이어가고 있는 모습은 아직은 세상이 너무 차거나 각박하지 않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알리고 있다. 모두가 조금만 노력하면 현실에서 내성의 긍정적인 사유를 꺼집어 낼 수 있을 것이다.『우동 한 그릇』은 훈훈하고 따뜻한 감성의 한 그릇이었다.
작가의 다른 작품 『마지막 손님』에서도 죽음을 눈 앞둔 어머니의 소원을 이루어 주기 위해서 한 소녀가 눈 속을 헤치고 과자를 사러온 이야기에서 과자점 종업원 게이코는 이미 가게 문까지 내린 뒤였는데, 과자점을 오던 소녀의 딱하고도 기특한 아이를 보고, 다시 그 가게로 되돌아와 과자를 파는 내용이다. 설정만 다르지만 역시 “마지막”이 강조되었다. 
일본 국회가 울음바다를 이루었던 순간은 모든 것을 다 초월한 숙연한 순간이었다. 감격에 굶주렸던 현대인에게 우동 한 그릇은 참으로 감성의 재발견을 시켜준 셈이다. “울지 않고 배겨낼 수 있는가를 시험하기 위해서라도 한 번 더 읽어보라.”고 일본 경제신문이 추천한 이 작품은 전 일본을 들끓게 했던 화제의 작품이다.
일본의 홋가이도(北海道)에서 또 식당명도 북해정인 점은 아무래도 춥고 배고픈 사실을 위한 작가 구리 료헤이(栗良平. 1954)의 설정이 아니라 홋가이도 스나가와(砂川)가 고향이라는 우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아름다운 이야기임에 틀림이 없지만 작가가 사기꾼이라며 내용의 지나친 설정은 일본에서도 문제가 되었던 점이 아쉽다. 
작가는『우동 한 그릇』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고 주장하였지만 작중의 시대 배경인 1970년대의 생활상을 고려해도 곳곳에 앞뒤가 맞지 않는 묘사들이 너무 많다는 등의 지적이 나오면서 실화 기반이 아닌 100% 순수 창작 즉, 픽션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세 들어 살던 소바집 주인이 사기 피해를 보고 직접 시가현 지역 언론에 폭로한 사건이 있고 작가의 아내가 일본에서는 그 책을 아무도 보지 않는다면서 작가가 여기저기서 돈만 받아 챙기는 사기를 저질렀다고 발설하기도 했다. 현재 일본에서는 거의 사회적으로 매장되었다. 작품 중에서 우동(일본어 원판에서는 메밀소바) 한 그릇의 가격이 150엔이라고 나오지만, 이 가격은 1989년 당시의 물가를 감안하면 지나치게 비싼 금액이었기 때문에 어떤 연예인이 자신이 진행하는 후지 TV에서 이 점을 지적하면서 그 당시 150엔이면 인스턴트 메밀 소바 3개는 살 수 있었을 가격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런 평가에도 불구하고 섣달 그믐날을 앞둔 어느 해의 첫 달, ‘우동 한 그릇’의 이야기를 회상하면서 어렵고 슬프게 살아가는 사람인 평범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고, 이 시대의 우리 모습이라는 생각에 다른 사람의 고통과 슬픔에 너무 무심 한 척 하지 않았는지 돌이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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