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멤버0416 대표 권지인<br>
리멤버0416 대표 권지인

기고 1 / 리멤버0416 대표 권지인

“어제는 여행 짐을 싸며, 엄마 아빠 이모 삼촌에게 받은 용돈도 꽁꽁 싸매며 한껏 들떠서 잠도 잘 못잤어요. 지금은 안개낀 인천 항이구요, 잘 다녀올게요. 선물은 무엇을 살까? 장기자랑은 우리반이 일등할 거야! 푸르른 낮과 밤을 찬란하게 보내고 올게요.”

그랬을 어제와 오늘. 내일을 앞두고…… 6년 동안 우리는 세월호에 갇혀 있습니다.

특별법 개정안, 대통령 시행령 반대, 그리고 특조위의 위기, 청문회, 선체조사위원회 구성, 사회적참사특별위원회 구성, 그리고 현재의 검찰특수단. 

지난 6년 동안 조사 조직은 구성되었으나, 특조위의 조사 사항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수위의 몇몇 행태들만 수사 중인 현재.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세월호 안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바뀌었나요? 안전의식의 변화에 만족해야 하나요? 침몰원인, 구조하지 않은 이유는 밝혀졌나요? 조사방해 행위, 기만날조 사항 등을 조사 수사하는 것이 끝일까요? “다 밝혀줄게” 약속한 현 정권은 약속을 지켰나요?

꽃비가 내리는 4월이 오면 저 같은 시민도 뼈마디가 아프듯 가슴이 저립니다. 시민이 이럴진대, 유가족들의 심정은 감히 헤아리지 못하지요. 6년간 몇 차례 치른 총선과 대선 속에 세월호는 늘 뒷전으로 밀리거나 오히려 도구로 쓰여지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때로는 선거 유세 메가폰 소리가 싫증나기도 하는 이 마음이 과한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와 세월호의 역학관계에서 세월호를 도구 삼는 모든 행태와 인물을 거르고 또 걸러야 하기에, 6년을 견뎌온 세월호 사람은 억한 감정을 추스르고 후보자들의 면면을 자세히 알아보며 투표하러 나섭니다.

‘4월 16’일은, 총선에 승리한 후보와 지지자들에게 기쁨의 날이기도 하겠지만, 세월호 참사 진상이 규명되지 않은 채 6년째를 맞이하는 날입니다.

 

활동가 배영란
활동가 배영란

기고 2 / 활동가 배영란

2014년 4월 16일, 그날의 비극을 우리는 똑똑히 목격했고 국가가 구하지 못해 생명이 희생되는 순간이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것을 보고 깊이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4.15 지방선거를 앞두고 피해자를 조롱하고 모욕하며 혐오를 부추겨 표를 사려는 정치인과 추모를 위한 현수막을 훼손하고도 사과는커녕 도리어 뻔뻔하게 구는, 부끄러움이라고는 한 점도 없는 사람들을 2020년이 된 지금도 보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여파로 여러 추모행사들이 축소 또는 취소됐습니다. 행사의 규모와 상관없이 참사의 희생자, 유가족과 우리가 서로 연결돼 있고 진상규명을 위한 마음이 계속되고 있음을 압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 아이들의 이름과 아이들이 사랑했던 안산의 곳곳을 돌아보고 불러봅니다. 아빠 옷을 입거나 아빠와 다니는 것을 좋아하던 다영이는 아빠와 손잡고 화랑유원지와 관산도서관에 다녔습니다. 아버지와의 장난을 좋아하던 민수는 살을 빼야 한다고 집 앞에서 아버지와 함께 줄넘기를 했고, 친구들의 고민 해결사 수경이는 중앙동 뉴코아 아울렛 앞에서 친구들과 놀곤 했습니다. 예지, 소정이, 수진이, 현정이는 어느 여름 화랑유원지 오토캠핑장에서 행복한 날을 보냈고 매일 아침 엄마에게 사랑한다 말하던 인호는 엄마와의 비밀 장소, 화정천 육교 앞에서 엄마와 데이트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역사 선생님을 꿈꿨던 성현이는 일요일 오후 아버지와 화랑유원지 축구장 축구하기를 좋아했고, 땀범벅이 되도록 안무를 짜고 연습해 올림픽기념관 무대에서 춤사위를 선보였던 경주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을 춤으로 표현하곤 했습니다. 운동 좋아하는 아빠를 따라 수임봉에 오를 때 껑충껑충 뛰며 웃던 미소천사 영만이, 세희네 가족들은 동명상가에서 주말 쇼핑을 했습니다. 차웅이는 옥구공원 팔각정에 올라 ‘야호’ 외치고 내려오는 길에 먹는 아이스크림을 좋아했습니다. 엄마와 농구하기를 좋아했던 수인이는 집 앞 산비탈에서 달리기를 연습했고 형이 너무 좋아 형을 따라 하던 범수는 친구들과의 만남의 장소, 원고잔공원을 좋아했습니다.
슬픈 이름과 아픈 장소로만 기억되지 않도록 함께 살겠습니다. 세월호 엄마, 아빠들이 안산의 이웃들과 행복하게 사는 것, 모두가 안전하게 생활하는 것을 아이들이 꼭 지켜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304명의 희생자 모두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활동가 방형민
활동가 방형민

기고 3 / 활동가 방형민

40대 중반에서 50대가 되는 동안 시간은 나에게만 흐르진 않았다. 초반 활동 때 윤기가 흐르던 얼굴이 세월의 풍파를 맞은 활동가들의 모습을 보며 6년이란 시간을 결코 무시할 수 없음을 실감한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후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활동해온 사람들이 여전히 많고 전국 뿐 아니라 해외 각지에서도 마음을 이어가는 이들이 많다. 다양한 환경 속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기억하며 오랫동안 잊지 않고 행동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세월호를 둘러싼 정치 사회적 환경 또한 역동적으로 변화했고 한 번도 우호적인 적이 없었다. 상황이 변하면 우리 활동가들은 그에 맞게 능동적으로 최적의 효과를 낼 수 있는 대처 방법을 고민했다. 그에 더해 공권력의 압력에 맞서 싸워야 했고 싸늘한 여론을 견뎌야 했고 가족과 친구 등 주변의 냉소에 무덤덤하려고 노력하거나 갈등을 정면으로 돌파해야만 했다. 우리는 왜 그래야만 했을까? 세월호 참사는 대체 무엇이기에 6년이 지난 오늘까지 우리는 멈추지 못하는 것일까?
많은 이들이 말했다. 세월호 참사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기에 바로 나의 일인 거라고. 희생자의 유가족들이 당사자이면서 우리 또한 당사자였다고. 참사의 당사자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안전사회 건설’이라고 말했다. 리본 하나를 만들 때도, 바람에 흔들리는 피켓을 두 손으로 꼭 잡고 있을 때도, 지나가는 시민들을 붙잡고 볼펜을 건네며 서명을 부탁할 때도, 아파하며 울고 있는 유가족을 바라보며 눈물을 훔칠 때도 ‘진상규명’을 위한 일이어야 하고 ‘책임자 처벌’을 위한 일이어야 하고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일이어야 한다. 행동 자체는 목적이 될 수 없고 거기에 만족해서도 안 된다. 시간이 흐르며 과정이 목적이 돼버리는 현상을 도처에서 발견하며 안타까움만 커져간다. 어찌 되었든 내가 무언가를 하고 있고 잊지 않고 있으니 된 거 아닌가 하는 피상적 안주가 아니라, 내가 지금 행동하는 일과 이 세 가지 목적이 직접적 인과로 맺어지는 목적지향의 것이어야만 우리의 행동들은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6년이 지났다. 우리는 더 이상 상주(喪主)의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내는 선구자처럼 행동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약속하지 않았던가.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라고.

 

세월호 6주기 추모시 l 류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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