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전투 기록화 자체는 매우 드문 편이다. 임진왜란 관련 고려대 박물관 소장의 평양성전투 병풍과 1592년 부산진 전투장면을 권이진이 그린 부산진 순절도(釜山鎭殉節圖. 보물 391호), 화가 변박이 원본을 보고 다시 그린, 송상현 선생 종가 소장본 동래부순절도(東萊府殉節圖. 보물 392호)와 임란 후 240년 후인 1834년, 동래부의 기록화가 역할을 했던 이시눌의 임진전란도(壬辰戰亂圖)가 있다. 이 그림들은 전쟁의 초기를 그렸다. 노량 해전 (1598년 11월 19일)이 끝나고 3일 후인 남해선소 왜성 소탕전 (11. 21~24)이 있었으므로 임진왜란의 최후 전투는 사실상 선소 왜성 소탕 전투가 마지막이다. 선소 왜성의 위치 확정 보고는 1925년 일본인 반 미치오(伴三千雄)씨에 의해서다. 따라서 서울대 소장의 측량도에서 선소 왜성이 누락된 것과 연구 대상에서 누락된 것은 그때까지 위치가 확정되지 않은 이유로 보인다.

정왜기공도병의 확대-선소왜성 모습
정왜기공도병의 확대-선소왜성 모습

1) 정왜기공도병(征倭紀功圖屛)
 이 병풍은 정유재란 때 파병된 명나라 군대 중 서로군(西路軍)과 수로군(水路軍)이 여수의 율림(栗林)과 순천왜성 전투, 노량해전, 남해도 소탕전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한양과 북경에서의 전승 축하연을 하는 장면을 도해한 12폭의 병풍이다. 전반부 6폭 병풍은 스웨덴 스톡홀름 극동아시아 박물관에, 그 후반부 6폭 병풍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각각 나뉘어 소장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그림을 구입했다는 소식이 2012년 2월 1일자로 동아일보 등에서 보도되면서 그 존재가 널리 알려졌다. 이후 이 그림이 2013년 5월 국립광주박물관 특별전 『남도문화전Ⅳ-순천』과 2014년 10월 국립중앙박물관 신소장품 특별전 『새롭게 선보이는 우리 문화재』를 통해 공개된 바 있다.
『동아일보』2012년 2월 1일자 A20면 「노량해전-왜성전투-남해도 소탕작전 ‘생생’-국립중앙
박물관, 임진왜란 전투 그린 병풍 ‘정왜기공도병’ 英서 구입」; 연합뉴스 YTN TV 2012년 2월
1일 12시 57분 방송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 그린 병풍 한국 왔다」2013년 5월 7일부터 6월 30일까지 국립광주박물관에서 순천을 주제로 열린 이 특별전에서 공개됐다. 설명문에는 제작연대가 18세기 전후로 종이에 채색된 높이 155.5×폭356cm 크기의 작품으로, “임진왜란의 마지막 해인 1598년에 있었던 순천왜성 전투, 노량해전, 남해도 소탕작전 등의 전쟁 장면을 그린 병풍이다. 이 병풍은 왜를 정벌한 공을 기념하여 그린 것으로 1~3폭 상단에 순천 왜교성 전투 장면을 볼 수 있다. 명의 제독 유정(劉綎) 휘하의 육상군과 조선 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 명 수군제독 진린(陳璘)의 연합군이 합동작전을 펼치고 있다. 전쟁의 진행 모습을 시간의 흐름과 지리적 배열에 따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구성하였는데, 명나라의 종군화가가 그린 것을 ”다시 모사한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설명은 19세기 일본에서 종이에 채색하여 높이174×폭370cm의 크기로 제작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내용은 “정유재란의 마지막 해인 1598년, 한반도 남쪽에서 벌어진 여러 전투 장면을 시간의 흐름과 지리적 배열에 따라 그린 그림이다. 화면에 금채를 사용하고, 구불구불한 윤곽선을 반복하여 산을 표현한 점, 길쭉한 비례로 인물을 표현한 점 등에서 일본 회화의 특징을 보인다. 전쟁에 참여한 중국 종군화가의 그림을 일본 화가가 모사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이 〈정왜기공도〉병풍은 원래 명나라 장수의 종군화가가 직접 전장을 보고 그렸다는 것이 중론이지만, 실제로 화풍과 형식으로 보아 일본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이러한 의견처럼 이 병풍은 명나라 관직자들이 자신의 이력에서 중요한 업적의 증거로 전투도가 포함되는 전승기념 증빙서류라 할 수 있다.

정왜기공도권의 확대-선소왜성 모습
정왜기공도권의 확대-선소왜성 모습

2)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卷)
『신동아』 1978년 12월호 302쪽 개리 래드야드 씨의 논문 「壬辰征倭圖 歷史的 意義」에서 노량 전투의 그림을 소개하고 있다. 400여 년 전 고대 전쟁을 묘사한 이 영화의 전쟁 장면은 이를 잊고 살던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 영화 <명량>은 임진왜란의 한 부분으로 임진왜란의 참혹함과 비장함을 여실히 보여줬다.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진짜 전쟁 장면은 어땠을까, 정말 영화의 장면과 같거나 더 비참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영상기기가 없던 시절, 현장을 기록할 수 없었다는 것이 아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400여 년 전, 명나라의 한 종군 화가가 자신이 직접 본 전쟁 장면을 그린 긴 두루마리이다. 이것이 바로 <정왜기공도권>이다.
이 화가의 이름과 생애는 고증할 방법이 없다. 현재 우리가 아는 유일한 단서는 이 화가가 명나라 지원군의 제독이었던 유정(劉綎) 장군의 부하였다는 것이다. <정왜기공도권>은 명나라와 조선 두 나라의 지휘관 회의부터 시작해 명나라와 조선 연합군이 왜구를 물리치는 최후의 전쟁인 노량해전까지 이어져 전쟁의 전 과정이 거의 다 포함되어 있다. 그림 속 사물은 공들여 색칠하지 않고 간결하게 묘사돼 있지만 인물들은 살아있는 듯 생생하고 전쟁 장면은 사실과 흡사하며, 내용의 구조와 구도가 합리적이고 더 나아가 명나라, 조선, 일본 3국 군대의 무기, 탄약, 깃발, 배, 군마, 막사, 수륙전 등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마치 종이 위에 펼쳐진 무성영화 같다. 자세히 보면 왜군 몇 명이 성문 안으로 걸어가는 모습도 있다. 이 명나라 화가는 장군의 명령이나 전적을 선양하는 목적으로 이 긴 두루마리 대작을 만들었을 것이다. <정왜기공도권>이 현재 우리에게 학술 연구는 물론 영화 예술계에 참고자료가 되는 귀중한 자산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화권(畵卷)의 신세는 순탄하지 못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50년도 안 돼 명나라는 몰락의 길을 걸었고 청나라 군대가 들어왔다. 어지러운 전쟁 속에서 화권은 종적을 감췄고 장시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정왜기공도권>이 세상에 모습을 들어내자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됐고, 동북아 정세를 바꾼 고대 전쟁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했다. <정왜기공도권>은 400여 년 전 조선과 명이 협력하여 왜구와 싸우는 전쟁이 화권에 옮겨졌고, 전쟁의 비참함을 다시 상기하게 한다.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이 임진왜란이나 일제 강점기에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무슨 짓을 했는지 잘 알고 있다. 이문화(異文化)에 대한 경외심에다 숨겨진 잔인성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침략의 주역인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난세의 시로 이 말을 남겼다. “꿈속에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참으로 덧없는 생애였다” 
일본인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겉으로는 평화국임을 애써 주장하나 ‘산 사람의 코도 베어간“ 잔인한 이비야(耳鼻爺)의 호전국가임에는 틀림이 없다. 전자는 일본인들의 다데마에(立前)이고 후자는 본심인 혼네(本音)이다. 승리한 전쟁의 블랙박스로서 두 그림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후세에게 귀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왜성은 역사의 블랙박스이자 후손에 남길 전리품이다.

저작권자 © 남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