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철 명상디자인학교 교장
박 철 명상디자인학교 교장

이른 아침, 대지를 밝힐 봄 햇빛이 찬란히 떠오릅니다. 금과 옥처럼 귀하디 귀한 빛 입자는 이제 막 피어나는 새 생명에게 온기를 전하며 사방팔방으로 퍼져 나갑니다. 
한 올 한 올 영근 빛 입자를 만난 씨앗은 호기심 어린 눈빛을 껌뻑거리며 창공을 응시합니다.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기억을 더듬으며 씨앗은 머지않아 웅비의 나래를 활짝 펼칠 것입니다. 이때가 되면 그 절제된 내공으로 어떤 경계와 두려움마저 내 탓으로 돌리는 겸손함을 품부할 것입니다.
내가 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비움으로써 존재한다는 그러한 지혜를 품부할 겸손입니다. 이 비움과 동시에 채워야 할 겸손이야말로 마땅히 우리가 가야 할 길이요, 담아내야 할 사명임을 일러 줍니다. 그래야 살 수 있고 그때서야 제대로 꽃을 피울 수 있다는 것을 씨앗을 통하여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필자 역시 이러한 비움과 고요한 겸손을 담아내기 위해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곧장 뒷마당 텃밭으로 향하며 명상합니다. 거기에는 온갖 미물들이 나누는 사랑의 화음과 새, 꽃, 풀, 나무들의 합창이 어우러져 격조 높은 사랑을 담아내고 있는 현장입니다. 가히 지상 최고의 사랑 심은 생명 교향악이 열리는 곳입니다. 
그들의 목소리는 먼발치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고요히 하기만 하면 어디서든지 들을 수 있는 생생한 사랑의 음률입니다. 그래서 늘 듣고 싶고 마음에 담고 싶고 사랑을 나누고 싶은 애틋함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벗이 되어 주셔서 고마워요. 오늘 당신의 목소리는 매우 아름답군요. 참 감사해요, 그리고 사랑해요’ 무언일망정 그들의 목소리에는 애심(愛心)이 가득하고 미소 짓는 표정에는 생애 처음인 오늘을 맞이하는 기쁨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어제와는 다르게 펼쳐지는 이들의 노랫소리에는 어떠한 상황이 도래하여도 감사와 고마움을 나타낼 의지가 스며있기도 합니다. 이쯤 되면 이들의 소리를 경청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냐고 자문해봅니다. 우리 역시 사랑과 감사를 담아낼 수 있도록 비우고 낮추며 채우는 의지를 밝히는 것이 도리임을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모두 둘이 아닌 하나로 연결되어 서로 돕고 살아가는 공생과 이심전심의 큰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이들 생명을 예찬한 박노섭 님은 시 ‘하나의 생명’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너요 너는 나니 / 나는 너로 하여금 충만하고 너는 나로 하여 온전하도다 / 너가 태어남이 내가 태어남이요 너의 죽음이 또한 나의 죽음이로다 / 나는 끝없이 태어나고 죽어가나니 무궁에서 비롯하여 무궁으로 움직여 흐르도다 / 너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요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로다 / 너의 넉넉함이 나의 넉넉함이요 너의 배고픔이 나의 배고픔이로다 / 너의 착함이 나의 착함이요 너의 악함이 또한 나의 악함이로다 / 이 세상 무엇 하나라도 나의 피와 살이니 하나가 나를 가난하게 하고 풍족하게 하도다 / 나는 너로 하여 비로소 존재하나니 크게 하나로 온전함이로다 / 우주 만유가 곧 나니 내가 그로부터 화생되었음이로다 / 흙과 공기와 물과 푸나무와 짐승들이 모두 나의 몸을 지탱하였나니 나의 핏줄이 곧 만유의 핏줄이요 나의 숨결이 곧 만유의 숨결이로다 / 나는 곧 우주요, 우주는 곧 나니 나는 너요 겨레요 인류요 생명이로다. 

이미 완벽하게 갖추어진 나를 나 되게 만들어준 이들의 고마움을 되새기면서 노래한 시입니다. 나는 내가 아니라 바로 너라는 직언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귀담아들어야 할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나 아니라는 것을 감지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어디에서든 마음을 조용히 다스리고 고요히 한다면 누구나 들을 수 있는 내면의 소리입니다. 
내가 그로부터 화생되었다는 이치 또한 만유일체의 원리입니다. 내가 태어난 것은 부모로부터이지만 나의 생함을 위해 공기와 물과 산소와 바람과 흙의 상호작용이 있기에 올곧게 성장해가는 것입니다. 
이런 이치에서 보면 생명의 부분과 전체를 인정하며 그들의 감각을 알아차리고 사랑을 보내는 것은 당연한 의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지금까지 생명이 율동하는 감각을 듣고, 보고, 느끼는 것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면 이제 심호흡하며 다시 한 번 천천히 귀 기울여 보십시오. 그들의 목소리에 심금을 울릴 감동이 서려 있고 그들의 외침에 생명을 귀하게 여길 비책이 있다면 우린 이를 외면하지 않아야 합니다. 
만약 눈앞의 사념(邪念)에 쫓겨 여전히 이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면 하나의 생명으로 맞이할 그 봄은 진정 우리 곁에 왔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으로는 이미 왔을지언정 속내는 여전히 냉함을 떨치지 못한 한겨울이나 다름없을 봄일 뿐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 봄은 과연 온 것인가? 그렇다면 이 봄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이러한 화두에 솔직하게 응답하면서 정녕 가슴 울리는 따뜻한 봄을 만들어 가는 것도 봄을 맞이한 우리의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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