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처럼 잔잔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꿈과 추억이 서려 있고, 남해군의 6개면 40개 어촌 주민의 생활터전인 강진바다가 이름도 잃어버리고 아프다는 신음소리를 내고 있다. 하동군의 섬진강물과 사천시의 가화천으로 흘러드는 진양호의 남강물이 생태계를 변화시켜 강처럼 잔잔하던 바다가 몸살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강진바다는 가야시대부터 왜로 나아가는 통로였지만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한 내해였는지 기록에 남은 것이 없다. 임진왜란 때는 거북선이 처음 참전한 사천해전이 있었지만 조선시대에도 남은 기록이 없다. 지금도 남해군의 행정지도에는 강진해로 표시되어 있고, 관광지도에는 강진만으로 표시가 되어있을 정도로 딱히 정해진 이름도 없어, 인터넷으로 강진만이나 강진해를 검색하면 남해의 강진만은 찾기가 어렵고 전남 강진의 소식들만 가득하다.

강진해에 접해있는 사천시에서는 사천만을 확대시켜 만구를 삼천포와 창선 사이로 정하고 지족해협, 남해와 연결되어있다고 하였으며 강진해에 대한 언급은 없다. 하동군의 홈페이지에는 금남면의 신노량은 광진바다에 접해 있다고 설명하고 있어 칭하는 이름도 다르다. 

강진해의 북서부는 노량해협을 지나 광양만에 연결되고, 북동부는 창선 삼천포 수로로 연결되며, 남으로는 지족해협에 연결되는 내해로, 대략 폭은 5km, 길이 20km, 면적 100㎢ 정도이며, 수심은 평균 2~3m의 얕은 바다이지만 대포(大浦,한개)와 광포(廣浦,너우개) 그리고 내포(內浦,안개)를 아우르는 남해군의 중심바다이다.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는 강진바다는 어릴 적에 불렀던 교가에 남아있다. 남해초교 “강진바다 넓고 깊어 태평양에로”, 광천초교 “강진바다 맑은 물 바라다보니”, 남해중학교 “강진물 넓혔어라 우리의 보람”으로라는 가사가 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하동군의 노량초교 교가에 “금오산 용자에 얻은 기상은 강진해 가슴속에 용을 타도다”가 들어 있어 그때만 해도 강진 바다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지만 왜 점차 잊혀가는 바다가 되고 있을까? 오늘은 내 어릴 적 놀이터며 마음의 고향인 강진바다를 찾아 가보려고 한다.

남해 사람들에게 강진해를 물어보면 강물처럼 잔잔한 바다라는 이미지만 있지 무슨 뜻인지는 모른다고 하며, 알려고 하는 노력도 부족한 것 같다. 
우리나라에는 같은 이름을 가진 마을이 많다. 전남 강진군의 강진만과 남해군의 내해인 강진해도 그중 하나이다. 전남의 강진은 편안할 강康자와 나루 진津자를 쓰며 물결이 고요한 나루라는 뜻을 가졌으나, 도강현과 탐진현을 합한 이름으로 병영이 있던 곳으로 옛날부터 전해오는 중심 고을 이름에 만을 붙인 것이다.

남해의 강진해도 강처럼 고요한 바다라면 강江자와 나루津자를 써서 강진해(江津海)가 될 것이며, 우리말로는 강나루 바다인데 강진해에 대한 한자 표기가 없기 때문에 강진의 뜻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가 없으며 그 바다를 오가던 나루는 또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예부터 남해의 외해(外海)를 방어하던 곳은 남면의 평산포와 곡포, 창선면의 적량이었고 남해의 내해(內海)를 방어하는 곳은 이동면의 내포(內浦,蘭浦)였지만 내해의 명칭이 언제부터 강진바다가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고, 고지도에도 없으며 지금의 지도에도 잘 표기되지도 않는 이름이 되었다.

난포현은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으로 조선말 주변의 곡포, 우현, 성현 등지에 성곽을 쌓을 정도로 왜구를 방어하는 전략적 기지였다. 난포의 남쪽 금산에는 봉수대가 있어 서북쪽의 원산의 봉수와 연계되어 전라좌수영에 전해졌으며, 미조항과 연결이 되는 곳으로 부근에는 역참이 없어 수로를 통하여 연결되어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난포 동쪽 20리에 어랑이 있다하여 해군 기지와 어항의 역할을 같이하는 곳으로 생각된다.

난포현에 속하는 옛 마을 이름을 살펴보면 난현내리(蘭縣內里)는 지금의 난음(蘭陰), 난양(蘭陽), 문현(門峴), 장전(障田) 마을을 포함 하는 곳으로 난포의 중심지였으며 그 시대에 불리었던 객사골, 사창, 새앵골, 축마비, 강안진, 비자당과 같은 이름들이 많이 남아있다. 

1638년 허목이 바다를 건넌 기록 범해록(泛海錄)을 보면, “신해년 8월 삼천포 옛 진에서 자고 이른 새벽에 조수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니 달이 아직 떠있고 바다 가운데서 뱃사람이 물살이 빠른 서쪽 해협을 가리키며 저쪽이 임진왜란 당시 이충무공이 공을 세우고 전사한 노량이라 한다. 

저녁에 다시 배를 타고 대방산 아래 계단처럼 생긴 제암에서 묵었는데 그 사람들은 배를 집으로 삼고 살며 누더기를 입고 아주 가난하였다. 다음날 아침 비자당을 지나갔다. 여기서 서쪽으로 20리에 남해현이 있다. 해안가의 나무가 모두 비자나무였고 그 위에 신사가 있어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허목이 내린 곳은 어디였을까? 비자당이 있는 해안은 지금은 매립이 되어 없어진 강안진(江岸津)이거나 강머리나루였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성현리(城峴里, 성고개城古介)는 무림(茂林), 정거(停車), 봉곡(鳳谷)을 포함하는 마을로 고진성과 옥터, 양마골 등의 이름이 남아 있으며, 특히 조선왕조실록에는 ‘1451년 문종이 성현의 수호군을 300명에서 400명으로 늘리다, 단종이 봉화대를 혁파하고 방호소로 이동하다, 세조는 성현의 방어중심에서 봉수를 폐지하고 척후중심으로 운영하고 성안을 지키는 것으로 바꾸다, 예종은 성현은 요해처로 2개의 연대煙臺를 운영하다, 1개 연대는 6명의 군인으로 구성하였다,

1489년 성종은 남해현성과 고개진 성을 쌓았으며 성의 높이는 13척 둘레는 760척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 시절 많은 군인들은 어디서 생활을 하였을까. 
석평리(席坪, 돗들)의 우리말은 돗들이다. 돗은 돗자리를 의미하지만 돼지의 뜻도 가지고 있다. 돗자리를 석자(席子)라고 한다. 지명사전에는 돛들로 표시하고 있는데 이는 주민들의 주장을 대필한 것으로 한자와는 맞지 않는다. 돛은 돛단배(帆船)의 돛으로 범자가 따로 있다. 

그러나 지역의 특성으로 볼 때 돋들이 맞을 것 같다. 돋이라는 말은 한자가 없는 말이기에 차자법을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높고 돋의 뜻이 돋다, 돋우다, 돋구다와 같이 높다는 의미가 있고 도드라지다, 겉으로 들어나서 뚜렷하다, 내밀다처럼 예부터 전해오는 우리말이기 때문이다. 띠라서 석평은 바닷가에서 볼 때 안쪽으로 점차 높아지는 양지바른 들이라는 뜻이지 돛단배나 돗자리와는 무관한 들이다.

초면리(草面, 새면리)는 초음(草陰), 초양(草陽), 초곡(草谷), 광두(光頭), 고모(顧母)를 포함하는 마을이다. 
광두(光頭)는 무슨 뜻으로 지어진 이름일까? 마을 사람들은 사람의 머리를 닮아 지은 이름이라 하지만 우리말에 광두라는 말은 없다. 17세기(1690년) 조선시대 사역원에서 간행된 중국어 사전인 역어유해譯語類解에 光頭는 믠머리를 말하며 대머리(禿子)를 칭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역어유해 상, 29a)

민머리는 정수리까지 벗어진 대머리나, 쪽 짓지 않은 머리, 벼슬을 하지 못한 사람 민대가리를 뜻하는 말이다. 미다에 머리가 합한 말이다. 다른 말로는 독두(禿頭)라고 하며 독수리, 민둥산(禿山)이 있다, 그렇다면 광두나루는 나무가 없는 민둥산 나루였거나, 돗들과 관련지어 돗들머리라고 할 수가 있다.

따라서 광두나루는 강진바다와 관련이 없는 말이기는 하지만 광머리가 강머리로 남해사투리로 발음되어 강나루에서 강진바다라는 말이 나왔을 것으로 추측해 본다.
지금까지 강진해와 강진해의 중심이었던 난포현의 옛 마을 이름을 살펴본 결과 추정 할 수 있는 곳은 강안진(江岸津)과 강머리 나루이지만 확정은 할 수는 없는 게 아쉽다.
만과 바다의 개념은 일반적인 상식에 준하면 될 것인데 전남의 강진만을 가진 강진은 강진바다축제를 하고 강진해를 가진 남해는 강진만 권역 축제를 한다. 원래의 이름을 버리고 서로 다른 이름을 선택한 것은 무엇 때문일지 궁금하다.

만(灣)은 바다나 호수가 육지로 둘러 싸여 있는 곳으로 바다가 육지 안으로 들어간 곳으로 삼면이 바다에 접해있는 곳이기에 육지가 파도나 바람을 막아주어 바다가 잔잔한 특징이 있으며 작은 것은 입강(入江), 포(浦)라고 하고 큰 것은 해만(海灣)이라 한다. 

해안선의 굴곡이 심한 남해안과 서해안에 많다. 남해와 가까운 순천만, 사천만, 광양만, 여수만이 있고 군내에도 동대만, 앵강만이 있다.
명칭으로 따지면 강진해는 지족해협, 노량해협, 창선, 삼천포 해협을 통하여 바닷물이 통하는 곳이므로 만이 아니라 내해라고 할 수 있다. 내해(內海)는 바다가 어느 한 곳이 막히지 않고 육지에 둘러싸인 좁은 해협을 말하며, 국제법에서도 해안이 굴입된 곳으로 입구의 폭에 비해 내륙해를 포함 할 정도로 굴입하고 입구 연결선을 직경으로 한 반원의 면적과 동일하거나 크지 않으면 만으로 간주하지 않는다고 정의하고 있다.

혹자는 섬들이 다리로 연결이 되어 육지가 되었다고 하나 바닷물이 통하고 있음으로 육지라고 할 수 없으니 남해의 강진해는 내해이지 만이라고 할 수는 없다.
강진해가 군민들의 관심으로 제 이름을 찾아서 인터넷에서 검색어의 주인공이 되고, 바다를 끼고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들을 오래 도록 간직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백상봉 작가

<약력>
한국문인협회, 한국pen, 강서문인협회, 
시조문학회, 민조시인 협회.
저서 : <공자 활을 쏘다> <마음은 콩밭> 
     <어럴럴 상사도야> <구룸산 곶고리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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