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에서의 삶은 자연스레 가족과 밀착되는 삶
남해에서의 삶은 자연스레 가족과 밀착되는 삶
  • 강영자 기자
  • 승인 2020.02.14 17: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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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내과의원 박정민 원장의 귀촌, 영어교사 접고 남해행 결심해 준 아내가 고마워
삶의 만족도는 별 4개! 7세 아들, 5세 딸, 두 아이 키우며 살기엔 ‘자연주의’ 남해가 좋아
두 아이와 함께 남해살이에 안착한 박정민, 윤혜경 부부
두 아이와 함께 남해살이에 안착한 박정민, 윤혜경 부부
기자의 요청에 의해 ‘질병관리본부에서 받은 표창장’을 보여주는 박정민 원장
기자의 요청에 의해 ‘질병관리본부에서 받은 표창장’을 보여주는 박정민 원장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연일 전국이 들썩인다. 그 와중에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질병관리본부의 정은경 본부장. 불과 3주 만에 확연히 초췌해진 몰골을 보면서 얼마나 이 시국 대처에 골몰하고 있는지, 그만큼 심각한 재앙인지를 새삼 절감하는 요즘이다. 이러한 시국에 눈에 들어오는 또 다른 남해의 이웃이 있으니, 바로 남해읍 농협중앙회 옆에 위치한 한국내과 박정민 원장이다. 내과 전문의인 박정민 원장은 남해로 귀촌하기 전 질병관리본부에서 감염병 역학조사관으로 근무한 전력이 있는 젊은 의사였다. 그는 최근의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에 대해 “매일 뉴스를 접하면서 저는 굉장한 슬픔을 느꼈다. 질병관리본부 관계자들과 지자체 방역 관계자들이 얼마나 고생하고 있을지 잘 알고 있기에 마음이 아팠다. 한동안 이 사태가 더 지속될 것이라 본다”며 “일선 방역당국에서는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그분들에게 채찍보단 파이팅을, 격려와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이어 “남녀노소 막론하고 손씻기와 마스크 착용, 불필요한 외출 자제가 필수며 지역 보건소의 지침과 안내에 협조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를 실제 마주했을 때 젊어 보여 순간 내가 잘못 찾아왔나 두리번거릴 정도였으니 몇몇 연세 있는 환자들이 그를 마주하자마자 “알라(어린 사람)가 앉아 있느냐”고 호통쳤다는 에피소드도 어느 정도는 수긍이 되었다. 1980년생으로 올해 마흔하나인 이 젊은 의사는 경상대 의대를 졸업하고 부산 백병원에서 수련한 전문의로 7살 아들, 5살 딸을 둔 두 아이의 듬직한 아빠이기도 하다.

꿈을 찾아 남해로 귀촌하기까지
 
이곳 남해에 아는 이 하나 없는 부산토박이 박정민 원장이 남해로 귀촌한 건 지난 2016년 11월. 어느덧 4년차에 접어들었다. 남해를 온 건 의대 시절, 동기들과 상주해수욕장에 놀러 온 게 다였던 그. 박정민 원장은 “2000년도에 처음 상주해수욕장을 와봤는데 그땐 지금이랑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북적였다. 경이로운 풍경이었다”며 “그 후에도 몇 번 놀러 온 게 다였는데 여기서 두 아이와 아내와 함께 정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말한다. 
그런 그가 남해로 오게 된 건 오로지 ‘꿈’하나였다. 밀양시 보건소에서 공중보건의를 거쳐 양산, 부산 등지의 병원에서 차곡차곡 경험을 쌓던 그는 기로에 놓였다. 계속 대도시에서 직장 의사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작은 병원이나마 자신의 모든 걸 걸고 개원의가 되어 볼 것인가. 그때부터 그는 개원의의 꿈을 안고 병원을, 여러 지역을 찾아보았다고. 
박정민 원장은 “밀양시 보건소에서 2년간 많은 노인 환자들을 만나는 경험을 하면서 보람이 컸다. 연로하신 분들과 의외로 잘 맞았다. 또 전공이 내과다 보니 혈압이나 당뇨, 갑상선 등 만성질환자들을 많이 치료하게 되었는데 그 또한 주로 노인 환자들이 많았다. 자연스레 산청군이나 남해군 등 시골 지역을 떠올리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다 운 좋게 이곳 ‘한국내과의원’과 인연이 닿았다고. 
전임자인 정경원 원장님이 경상대 의대 선배인 데다 산보다 바다를 좋아하니 ‘남해’에서 사는 것도 괜찮겠다는 판단이 들어 귀촌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더불어 남해군의 이웃 의사들도 다 좋고 서로 믿어주고 지지해주는 분위기여서 도시의 대형병원과는 다른 진풍경이었다고 한다.
학교 영어교사였던 아내의 승낙이 천군만마

귀촌을 결심했으나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예상치 못하게 가족의 큰 반대에 부딪혔다. 특히 양가 부모님의 반대가 무척 컸다고 한다. “멀쩡한 도시 놔두고 그 시골까지 왜 가느냐. 손주들 고기잡이시킬 일 있느냐”는 반대에 힘이 빠질 때 그에게 천군만마같은 힘이 되어준 건 동갑내기인 아내 윤혜경 씨.
당시 아내 혜경 씨는 한국외대를 졸업하고 영어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교직생활 10년차인 아내에게 박정민 원장은 간곡하게 “시골로 내려가서 우리 두 아이에게 더 집중하면서 살아보는 건 어떨까? 내가 더 열심히 할게, 나 믿고 함께 가자”고 부탁했다고. 아이가 하나면 모를까 둘이 되니 엄마의 애정과 손길이 더 절실한데다 일과 직장의 양립도 어렵겠다는 판단과 무엇보다도 남편으로서의 욕심도 좀 있었다고. 
고맙게도 이를 흔쾌히 승낙한 아내 혜경 씨. 도시에서만 살아봐서 적응을 못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외려 남편인 본인 보다 더 잘 적응해 매번 놀라고 있단다. 박정민 원장은 “도서관도 조용해서 좋고 아이들을 위한 공연과 프로그램도 많고, 공동육아나눔터에서는 장난감도 다 무료로 빌려준다며 아내가 너무 좋아하더라. 그렇게 밝게 잘 생활하는 아내를 보면서 스스로 더 반성이 되었다. 귀촌 초창기 땐 사실 내가 아내보다 더 뭐가 있네 없네 하면서 제법 투덜거렸다”며 웃었다.

몇 번 놀러 온 것과 
사는 건 완전히 다르다

호기롭게 ‘개원’을 했으나 두려움이 없다면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첫 1년을 버티는 게 관건이라는 생각에 정말 절박하게 생활했다는 박정민 원장. 그는 “과연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에 잠 못 이룰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아무리 힘들어도 1년은 버틴다는 걸 가슴에 품고 정 안되면 ‘응급실 당직’이라도 서야지 하는 마음으로 버텼다”고 말했다. 그런 그였기에 귀촌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항상 ‘제2플랜’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사실 거의 전부를 걸고 하는 감행하는 귀촌이기에 계획대로 안됐을 때 만회할 뭔가가 필요하다. 저는 병원일을 못할 경우 대리운전 기사를 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며 비장하게 말했다. 하지만 다행히 그가 진료 외에 다른 일에 뛰어들 기회(?)는 사라졌다. 
절박한 심정으로 살아온 그에게 남해는 과연 어떤 곳일까? 그는 “별 5개 중 4개를 줄 정도로 만족하는 삶”이라 했다. 특히나 그는 “저절로 ‘저녁이 있는 삶’, ‘가족과 함께인 삶’이 되더라. 시골 특성으로 오후 4시 즈음부터는 환자가 줄어 칼퇴근할 수 있고, 읍 시가지라 해도 저녁이면 딱히 갈 곳이 없고 곧 어둑어둑해진다. 술 마실 일이나 회식도 거의 없다 보니 자연스레 가족에게 충실한 삶이 된다”며 미소지었다.

‘남해살이 오리엔테이션’ 자료집이 있다면!
 
시작하는 단계에선 뭐든 불안하기 마련이다. 귀촌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남해살이 가이드라인, 남해살이 오리엔테이션 자료집 같은 게 있다면 어떨까. 특히 그는 ‘집 구하기의 어려움’과 ‘남해인의 언어 특성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노라 터놓았다.

박정민 원장은 말한다. “왜 우리 대학교 처음 가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하잖아요. 그런 것처럼 타지 사람들은 여기 처음 식당가면 놀래요. 투박한 말투라던가, 1인분은 안 팔려고 한다던가 몇몇 특징을 발견하게 되죠. 귀촌한 사람들이 전입 신고하러 갈 때 ‘남해살이 오리엔티이션’ 자료집을 주면 어떨까요. 교통시설이나 의료기관, 관공서 등의 위치와 이용방법, 택시 기본요금이나 생활물가 정보, 가볼 만한 곳 등등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 놓는 거죠” 
그런 그가 꼽는 남해살이의 즐거움은 단연 ‘소풍’이다. 박정민 원장은 “근교에 간단한 여행을 가거나 한나절 소풍 갈 곳이 많아 좋다”며 특히 ‘대국산성’의 광활한 아름다움이 너무나 좋고 삼동면 농가섬, 원예예술촌 등을 추천하는 소풍 장소로 손꼽았다. 자가용이 아닌 걸어서 출퇴근할 수 있고, 아이들과 저녁에 같이 놀아줄 수 있는 남해에서의 삶이 행복하다는 그를 보며 더 많은 이웃의 ‘저녁이 있는, 즐거운 삶’을 더불어 꿈을 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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