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 이사장의 본명은 류창수다. 호랑이띠여서 범호(虎)에 뫼산(山)자를 따서 호산이라는 호를 지었다. 2016년 9월30일 대한체육회 회관에서 개최한 서울특별시야구협회·서울특별시생활체육회·서울특별시야구소프트볼협회 등 세 단체 통합행사에서 (재)류호산장학회 류창수 이사장은 임원 70명이 투표하여 98%의 지지를 얻어 절대 다수로 서울시야구소트볼협회 회장에 당선되었다.

류 이사장은 2017년부터 서울시야구소프트볼협회 초대 협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협회장 취임식에서 “협회 임직원 및 관계자 여러분들과 한마음 한뜻이 되어 재임기간 동안 야구소프트볼이 모두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스포츠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류 이사장은 30대에는 열렬한 축구팬이었다. 1970년대 우리나라 청룡팀을 함흥철 감독과 김정남 코치가 이끌 때 태능 선수촌을 드나들며 선수들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던 후원자이다. 이후 야구에 푹 빠져 자신의 이름을 건 류호산 야구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류 이사장은 평생 모은 1,000억여원의 자산으로 일찍이 류호산장학회를 창립하여 장학사업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 류 이사장은 몇 년 전부터 남해군에서 학생백일장을 열어 시상하고, 장학금도 지급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열린 제3회 류호산백일장에는 남해군내 10개 중학교와 6개 고등학교 학생 120여명이 참가했다. 류 이사장은 매년 남해군 11개 중학교에 100만원, 6개 고등학교에 150만원, 대학교에 200만원을 장학금으로 지급했다. 

평생 고생하며 일군 재산을 사회에 환원해 장학회를 만들고 고향에서 백일장을 열어 고향의 후대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게 되자 류 이사장은 꿈을 이룬 듯 감개무량했다고 한다. 류 이사장은 “향학열에 불타는 인재에게 아낌없이 장학금을 지원하고자 한다”며 “수혜 학생들은 인격과 실력을 갖추고 헌신의 자세로 국가와 사회 발전에 이바지하도록 정진해주기 바란다”는 소회를 밝힌바 있다.

류 이사장은 젊은 시절 상경하여 을지로 등지에서 종이관련 사업으로 부를 축적한 자수성가형 사업가이다. 그는 그동안 각종 봉사단체에 헌신적으로 참여해 왔다. 미8군사령관, 미8군연합사령관을 위시해 한미친선봉사상, 라이온즈협회 봉사상과 수많은 감사패를 받았고 1990년에는 저축왕으로 노태우 대통령에게서 국민헌장 석류장을 받기도 했다. 지난 2019년 12월에는 스포츠 발전에 애쓴 공로로 100년사에 처음으로  박원순 서울특별시 시장에게서 표창장을 받았다. 그리고 1991년부터 2019년까지 10년 동안 서울특별시 모범납세자로 선정되어 감사패를 받았다.

일찍 떠나온 고향이 그리워 1977년 남해로 들어가는 초입인 노량대로변 4km에 벚나무를 심어 봄이면 남해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아름다운 벚꽃을 선사하여 아름다운 남해를 보여주고 있다.
1978년 박필룡 남해군수로부터 푸른남해 건설에 조경수를 보낸 공로로 감사장을 받았다. 류 이사장은 고향인 이동면 다초마을에 시가 1억2,000만원의 땅을 기증해 마을에서 기증비를 세우기도 했으며 다초 모교에 교실마다 비디오세트를 설치 해주고 이순신 장군 동상을 세워 주었지만 폐교가 되어 아쉽다고 한다.

1938년생으로 팔순을 넘은 나이임에도 류 이사장은 꼿꼿한 자세와 적극적인 사회활동으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현해탄의 파도가 밀려오는 산자수명한 고향 남해의 정경이 떠오를 때마다 류 이사장은 조용히 눈을 감아 본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했던가. 오래전 떠나온 고향을 위해 적으나마 보은을 해야겠다는 심정으로 오늘도 힘쓰고 있다.

(재)류호산장학회의 류호산 이사장이 지난 1월10일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린 재경남해군향우회 신년인사회를 며칠 앞두고 1000만원을 군향우회 발전기금으로 협찬해 화제다. 뿐만 아니라 군향우회 신년인사회에 초대돼 공연을 한 트로트 신동 정동원 군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구덕순 재경남해군향우회장은 “류호산 이사장님은 이번뿐만 아니라 33년 전 군향우회 사무실 기금마련에도 동창하신 분”이라며 “류 이사장님의 애향심에 향우를 대표해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류 이사장의 생애는 파란만장 그 자체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패전을 앞둔 일본제국은 한반도 수탈에 두 눈을 부릅뜨고 날뛰고 있었다. 일제의 수탈도 모자라 한반도 남쪽에는 괴질이 돌았다. 어린 류 이사장도 이때 장질부사(장티푸스)에 걸려 생사를 헤맸다. 의약품이 귀해 십중팔구 생명을 잃기 마련이었다. 부모님은 시신을 치우기 위해 동네 장정 두 사람을 불러 부탁했다. 그날따라 날씨가 더워 두 사람은 집에서 담은 막걸리를 달라고 해 더위가 가시기를 기다려 해질 무렵 시신을 수습하려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 윗목에 홑이불로 덮여있는 어린 시신을 거두어 나가려는데 이게 웬일인가? 시신의 다리가 꿈틀거려 고함을 질러 부모를 불렀단다. 만약에 막걸리가 없었더라면 어린 목숨은 지체 없이 지하에 묻혀 불귀의 객이 되었을 것이다. 어린 류창수는 이렇게 해서 다시 태어났다.

이 일을 겪은 후 어린 류 이사장은 남보다 건강하게 자랐다. 병원을 모르고 성장했으며, 노년기에 접어든 지금도 활발하게 사업을 벌이고 있다. 건강한 몸을 바탕으로 열정적으로 사업을 벌인 결과 실물경제의 흐름을 읽는 눈을 갖추었고 사업에도 성공했다. 이 결실을 사회에 나누고자 장학회를 설립했던 것이다. 

류 이사장은 이제껏 이룬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장학사업에 전념하려 한다. 지금도 술좌석에 앉아 담소할 때면 유년시절 막걸리로 인해 소생한 하늘의 섭리를 생각하게 된다. 하늘 아래 작은 인간임을 자각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항상 감사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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