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날, 할머니의 미소
장날, 할머니의 미소
  • 남해신문
  • 승인 2020.01.17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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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철명상디자인학교 교장
박 철 명상디자인학교 교장

사람이 엮어내는 표정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어떤 모습일까요. 표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그중에서도 특히 미소가 주는 아름다움이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나거나 혹은 모르는 사람이 길을 물어올 때면 우리는 그 낯설음에 약간의 경계를 두기도 합니다. 처음이 주는 서먹함, 망설임 등이 그것인데 이때 이를 적절히 반전시킬 수 있는 표정이 있다면 그것은 미소가 아닐까요. 미소는 어느 웃음보다 절제된 감정으로 내면의 중심부가 완벽히 하나로 이어질 때 우러나오는 신심(信心)입니다. 
또한 미소는 밝기의 표상이자 향기로 반드시 성인의 미소만큼은 아니더라도 웃음이나 미소가 사라지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오감(五感)의 한 부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숨결이 고요해지고 심신이 한결 청명해지는 경지 속에서 드러날 미소의 오묘한 힘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얼마 전 장날에서 만난 할머니의 미소를 통하여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필자가 사는 동네에서 약 1km 남짓한 곳에는 오일장이 열리고 있습니다. 5일마다 맛보는 장날의 발랄함 속에는 나눔을 매개로 한 덤의 문화가 자리하고 있기에 그 의미가 특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장날은 아무리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변함없이 생기를 솟구치게 하는 정이 있기에 여전히 기다려지는 특별한 날이기도 합니다. 여느 장날과 마찬가지로 겨울의 체감 온도가 실체보다 더 매섭게 몸을 움츠리게 하는 가운데서도 장으로 향하는 동네 분들의 발걸음이 가볍기만 합니다. 

그러나 매서운 추위와 칼바람으로 얼굴을 들 수가 없을 정도여서 장으로 향하는 걸음걸이는 더디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한참을 바람과 씨름하듯 이리 밀고 저리 밀려나고 하며 장에 간신히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철수를 하려는 듯 상인들은 가림 막 아래 좌판에 놓인 고기류 하며 채소류 등을 나무 상장에 담으려 분주히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일부 상인들은 철수하기 위해 짐을 꾸리는 모습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일순간 물건을 사지도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앞을 가렸습니다. 그러나 그러는 와중에도 다행히도 몇 안 된 상인들은 단 한 편의 물건이라도 더 팔세라 흥정의 기세를 놓치지 않으려 굵은 목소리를 여과 없이 내뱉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늦게 도착한 마당에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여유가 없었습니다. 애초 기대한 장날 특유의 이미지가 사라진 지금은 오직 목표한 명태만 얼른 사서 이 춥고 한산해진 시장을 빨리 벗어나야겠다는 마음이 앞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추위에 서둘러 끝낼 것이라며 명태 다섯 마리 값을 흥정하는 것조차 마음이 급해서인지 쉽사리 결말이 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마음이 급해진 그사이에 무언가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무의식적으로 오감을 자극하고 있다는 사실이 흥정이 되지 않은 원인이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잔뜩 웅크려진 채 고깃값을 논하는 할머니와 필자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선이 대뇌와 신경세포를 자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선은 다름 아닌 바로 옆자리의 사각 나무토막에 걸터앉아 굴을 팔고 있는 동그란 형상의 얼굴을 한 할머니의 눈길이었습니다. 매우 인자한 모습에 입가에 엷은 미소 띤 할머니는 아까부터 이쪽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찬 바람에 얼어붙은 할머니의 손가락 마디는 굽어진 채, 들고 있는 한쪽으로 기울어진 바가지에는 팔다 남은 듯한 굴이 반쯤 담겨있었습니다. 그 할머니 역시 엄습해오는 칼바람과 더 높아진 체감온도에 서둘러 팔고 자리를 떠야겠다는 생각을 지닌 듯하였습니다. 그의 눈길에는 마치 “보소. 젊은 양반, 오늘 따온 굴, 싱싱해요. 오늘 새벽 바로 잡아 왔어. 얼마 안 남았어. 싸게 다 줄 테니까 사 가게”라며 소리치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따뜻한 미소와 인자한 모습은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뇌리에 더욱 깊이 각인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에 이끌렸을까요, 필자는 즉시 미소로 화답하며 조금 전까지 흥정하던 명태 4마리를 2마리로 줄이고 그 줄인 값으로 할머니의 굴 만 원어치를 사고 말았습니다. 

할머니와 필자는 물건을 구체적으로 흥정하기 위하여 여러 말이 오고 간 것도 아닙니다.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미소에 이끌린 필자는 애초의 결심을 번복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니 이끌렸다기보다는 그와 필자는 미소로서 이미 하나가 된 것이었습니다. 웃음의 너울 속에 드리워진 위대한 미소의 힘. 그 힘은 가히 기적이라 할 만큼 어떤 것이라도 이끌 수 있는 경이로움을 지니고 있음을 직감하였습니다. 
인자하고 자애로운 할머니의 미소, 단 한마디 말없이도 복잡한 생의 갈림길에서 삶의 중심을 잡아주는 넉넉한 미소야말로 우리 시대를 이끌 진정한 힘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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