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정자 심리학박사
류정자 심리학박사

어느 가을날 상담실에서 만난 L내담자는 서울에 위치한 E대학 2학년에 다니다가 병원에서 심한 거식증 진단을 받아 휴학을 하고 B시로 내려오게 된 여학생이다. 거식증은 의학적으로는 신경성 식욕부진증에 해당되는데, 현재로서는 무엇이 신경성 식욕부진증의 원인이 되는지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서울의 S병원 정신건강의학과 담당의사로부터 L내담자의 경우에는 심리적 요인이 중요한 원인이므로 심리상담을 받아 볼 것을 권유받았고, L내담자는 혼자 서울에 남아서 대학생활을 지속하기가 힘들다며 자퇴를 하려고 하였다. 어머니가 어떻게 들어간 학교인데 자퇴를 하냐고 만류하여 좀 더 지켜보고 결정을 하자고 하고 일단은 학교 측에 휴학을 신청하고 부모가 살고 있는 B시로 L내담자를 데리고 왔으나 하루 종일 방안에만 있는 딸을 설득하여 필자의 연구소로 찾아오게 되었다. 내담자인 L양은 첫눈에 몸집이 마르고 왜소해 보였고 챙이 있는 검정 모자와 얼굴을 거의 덮다시피 한 검정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상담자인 필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자신의 발 아래쪽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머니로부터 들은 내담자에 대한 어릴 적 정보는 집에서도 말수가 거의 없는 편이었고, 친하게 지내는 친구도 없어 내성적이었다고 하였다. 건강한 20대 젊은 여성들은 한 달에 한 번씩 월경을 하는데 거식증이 심한 L내담자는 석 달이 지나도록 월경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하는 걱정 섞인 엄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내담자 L양은 거의 말이 없는 상태여서 상담시간에 가족화를 그리도록 도구를 제공하자 나타난 그림에서 어머니는 자신에게 다소 호의적이었지만 다른 지역에서 음식장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자주 만나기가 어려웠고, 아버지는 자주 술을 마셨고 폭력적이라 무서워서 대화가 어려웠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어머니와의 상담에서는 남편이 가정과 자녀에게 무관심했음을 탓했지만, 정작 자신은 딸인 내담자에게 과도하게 집착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녀에 대한 지나친 유대는 아이가 자신이 타고난 본성과 기질대로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게 된다. 오히려 자발적인 기능을 방해해서, 결과적으로 딸이 건강하게 성장하지 못하고 의존하는 경향으로 이끌었음이 보였다. 필자는 내담자의 증상을 치유하기 위해서 몇 차례의 심리상담을 진행하던 중, 긍정단어들을 제공해주고 그 단어들이 가진 원래의 뜻을 소리를 내어 읽어보게 하였다. 긍정단어들 중에서 자신에게 해당하는 단어들에 밑줄을 그어보라고 하자, 자신과 관련 있는 긍정단어는 없다고 하며 펜을 놓아버렸다. 필자는 L내담자에게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니 급하게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었다. 잠시 동안 한 잔의 차와 명상음악을 들려준 다음에 스스로 돕기 과제로 이 단어들이 어떤 효과를 미치는지에 집중해보도록 하면서 이 단어들을 상식적인 수준에서만 받아들이지 말고 자신에게 와 닿는 의미를 충분하게 느껴보도록 하였다. 잠시 후 소리를 죽인채 내담자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괜찮다며 소리 내어 울 수 있도록 격려하고 지지해 주었다. 내담자의 어깨가 들썩이며 울음소리가 목구멍에서 꺼이, 꺼이 터져 나왔다. 그동안 얼마나 많이도 아파했을까… 오랜 시간동안 참 외로웠다는 그녀는, 부모님은 당신들의 생활에 급급해 자식은 신경쓰지 않고 방치했다고 생각한다며, 단지 학원에 보내줄 뿐 정작 자신에 대한 것은 궁금해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어렸을 때 부끄러워서 표현을 잘 하진 못했지만 부모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어요” 라며 계속되는 상처 때문에 점점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것 같았다고 하였다. 필자는 내담자에게 지금의 내 모습은 모두 과거의 상상이 만든 결과이니 새로운 자신의 미래를 원한다면 미련두지 말고 지금 떠오르는 상상의 낡은 액자를 멋진 액자로 바꾸도록 주문하였다. 매일 일정한 시간을 내어 차츰 늘려나갈 수 있도록 이 강력한 단어들을 규칙적으로 반복하면 저절로 적당한 자신만의 창조적 에너지가 생성되어 나의 참 모습이 그대로 외부로 실현될 것이라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도록 훈련하였다. 차츰 내담자에게 생기가 돌아왔고, E대학교에 복학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던 날의 다행스러운 기분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필자가 자녀를 둔 부모에게 바라는 것은 아이가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보내는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자녀의 안정애착을 발달시켜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자녀와 나는 다른 객체라는 것을 인식해야하며, 부모 자신의 실수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자녀들은 마음의 방향을 바꿀 수 있을 것이며 심리적으로 건강하게 아이로 성장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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