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철명상디자인학교 교장
박 철명상디자인학교 교장

“자연은 위대하다.” 누구나 공감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은 왜 위대한가? 위대하다고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사람은 자신이 정한 가치대로 선악을 판단하지만,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누구든 차별 없이 응대합니다. 특히 경쟁이나 약육강식에 의미를 두기보다 공생과 상생으로 생(生)을 도모하는 행보는 많은 사람에게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위(無爲) 즉 자연 그대로 인위적인 방식을 가미하지 않은 삶의 양식입니다. 사시(四時)의 동하고 정하는 운수나 절기를 비롯하여 순연하게 엮어지는 계절의 감각이 그렇습니다. 어느 누가 지시하거나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것도 아닌데 어쩜 이렇게 절묘하게 때에 이르러 시작되고 맺음이 분명한지 그저 신묘할 따름입니다. 

본래 이때쯤이면 일 년 내내 활발하던 만상(萬狀)의 기운이 안으로 수렴될 시기입니다. 어찌 보면 이만한 열정과 내공이 있기에 봄날에 태동할 씨앗을 발현하기가 용이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가을과 겨울을 잇는 이때는 안으로 절제된 감각을 품부할 가장 엄정한 수행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마음의 용사(用事)에서 새벽에는 씨앗을 북돋우면서 내면을 고요히 하고 오전에는 심기(心氣)를 아우르며 오후에는 양기를 활발히 뻗치고 저녁에는 심신을 편하게 하는 양상과 같은 맥락입니다. 이러한 질서가 자연의 본능이요 섭리라면 사람의 마음도 사계절처럼 씨 뿌리어 피어나고, 성장하면서 열매 맺고 저장하는 이치를 어찌 마다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누구든지 이러한 체험을 하지 않고서는 자연의 섭리를 느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담론도 문명과 기술, 정보와 개발이라는 논리에 편승하여 실체적 진실을 탐구할 여력을 갖지 못한다면 자연에 대한 인심(人心)은 더욱 멀어지고 말 것입니다. 인간은 자연과 함께 숨 쉬고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상생공동체입니다. 상생은 자타(自他)가 일체(一體)요, 대소(大小), 장단(長短), 전후(前後), 좌우(左右), 질량(質量)과 조화를 이룹니다. 이런 점에서 자연은 곧 지금 머무르는 곳에서 내 마음 안에 융화되고 있는 또 하나의 생명입니다. 많은 현자(賢者)가 우주 자연이 곧 나요 내가 우주 자연이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행보가 단절되었을 때 오는 상실감이 지대하다면 이것을 그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겠습니까? 

비근한 예로 가끔 마을에서 공사하는 현장을 볼 때면 하필 자연 생명이 안으로 응축될 이 시점에 땅을 파헤치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이냐며 숙고해봅니다. 비록 사람이 편하게 살고자 하는 일이긴 해도 자연의 섭리에 따라 동정(動靜)이 명확히 드러날 시기는 가급적 피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점입니다. 

우리 사람이 사계절 내내 자연으로부터 얻는 것이 얼마나 많고 무한합니까? 이를 고려하여 본다면 본성대로, 순연한 질서대로 살아가려는 그들의 의지를 더는 왜곡, 절단, 파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계절로 보아 정(精)과 기(氣)가 안으로 수렴할 이 시점에, 포크레인으로 파헤친 땅의 색깔을 보니 여전히 황토색 그대로여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한편으로는 정말 오랜만에 숨을 쉬는 그들의 비애(悲哀)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얼마나 참고 또 참았을까? 얼마나 숨을 쉬고 싶었을까? 사시사철 내내 시멘트나 콘크리트에 뒤덮인 채 그들의 생명이 여지없이 단절되어버린 데 대한 안타까움, 그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아아! 이 땅을 본 지 언제였던가? 아주 어린 시절에 본 그 땅이 아니던가? 하지만 일말의 동요도 없이 그 고유의 빛깔 하며 성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너는 정말 위대한 자연이다. 정말 고맙다.”

자연에 대한 찬사를 말로써 다 표현할 수는 없지만, 특히 사람의 심연을 울릴 사유에서 꾸밈없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본성을 대변할 교훈으로 깊게 회자하여 봅니다. 본성으로서의 자연, 이제 그 순연한 가치를 우리 생활 속에 깊숙이 반영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이 죽으면 사람도 죽는다, 땅이 숨을 쉬지 못하면 사람도 숨을 쉴 수 없다.” “땅 아끼기를 어머니의 살을 대하듯이 하라” 이러한 담론은 향후 우리의 운명이 가늠할 목표요, 삶의 지평을 새롭게 열 가치라는 점에서 더욱 엄숙히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전체 자연을 살리는 길이기에 더욱더 그렇습니다. 만약 이러한 이치에서 어긋날 때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른바 기후 대변동으로 향후 우리에게 도래될 재앙과 같은 것을 유념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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