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1년 일기장(왼쪽)과 2019년의 일기장,글씨 크기가 세월을 보여준다
▶ 1991년 일기장(왼쪽)과 2019년의 일기장,글씨 크기가 세월을 보여준다

물방울 하나가 톡, 그 위로 물방울 하나가 다시 톡. 어느새 그렇게 모여 강물이 되어 흘렀던가. 서면 우물마을의 여든둘 정민기 어르신. 별일 없이 산다 생각했던 그의 일상에 작은 물방울이 하나 튀었다. 1991년 1월 4일의 일이다. 당시 장상택 면장으로부터 우물마을 이장으로 명한다는 임명장 하나를 받아들었다. 그냥 있어선 안 될 상 싶었다. 30년 일기 쓰기 아니 평생 쓰기의 단초, 그게 시작이었다. 2019년 11월 그는 이제 30년차 일기 쓰기를 이어온 사람이 되었다. 

“그래도 이장 일을 하는데 
야무치게 해야제”

아들 둘, 딸 넷 총 6남매를 둔 농사꾼 정민기 어르신. 그가 우물마을 이장 업무를 시작한 건 1991년 1월 4일. 그때부터 1994년 말까지 총 4년 동안 이장을 맡아 크고 작은 마을 일을 하게 되었다. 그가 일기를 쓴 것도 이장으로서 느끼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당시는 지금처럼 컴퓨터가 대중적으로 보급되던 시절도 아니었던데다 당시 마을 관련 행정공문도 죄다 서면 회룡 출장소에 들러 손으로 직접 써서 발송하던 때였기에 기록이 특히나 중요했다. 그때부터 기록하는 습관이 손끝에 붙어버렸다고 한다. 
1938년 10월 6일생인 정민기 어르신, 1991년이면 53세의 나이. 어르신은 말한다. 
“팔순이 넘었으니 당시 오십셋이면 지금 돌아보면 참 한창때지. 그런데 당시엔 한창이고 뭐고 그런 생각이 있는가. 그저 면장님께 임명장 받아드는 순간, 그래도 마을 일인데 이장인데 야무치게 안 해야겠나 그 생각뿐이었제. 참 글 많이 썼제. 금전출납부도 전부 다 적어놓고. 공문도 전부 직접 쓰니까. 옛날에 이장 하면 글 많이 늘어. 죄다 손으로 써서 하니까. 지금이야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요새는 마을방송도 이장 저거 집에서 스마트폰으로 하잖는가. 동민들 모임이나 있으모 마을회관에 나올까, 요새는 이장도 회관에 잘 안 나오는 세상 아닌가”

“작년 이맘때 뭐했지? 일기장 찾아보면 그때가 내가 딱 보여”

그렇게 시작된 일기 쓰기는 2019년 11월 21일 현재 총 21권의 대학노트 분량이다.
근 30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이제는 팔순이 된 아내 박덕자 씨와 저녁밥을 먹고 나면 꼭 일기를 쓴다는 정민기 어르신. 일기를 쓰는 시간도 계절마다 조금씩 차이는 난다고. 봄 여름은 해가 길어 해지고 저녁 먹고 8시쯤 쓴다고 하면 요즘처럼 해가 짧을 땐 저녁 6시면 일기를 쓴다고 한다. 쓸거리가 작을 땐 10분 정도면 뚝딱이지만 읍내나 외지로 다녀온 날 등 일이 많을 땐 30분도 걸리기도 한다고. 쓰기만큼이나 읽기도 좋아했던터라 2015년도까지는 남해신문 애독자셨다고 한다. 그러다 망막에 이상이 생겨 백내장 수술도 하고 다 해봤지만, 돋보기를 써도 큰 제목만 겨우 보여 결국 신문 보는 것을 중단하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엔 백내장이라 캐서 수술했더니 한 3년 빼꼼 그것도 잠시라. 돋보기를 써도 영 시원찮아. 할 수 없어서 2015년부터는 남해신문을 떼삤어요. 그래도 엊그제 보건소 가서 치매검사 받는다고 이거저거 그림도 그리고 더하기 빼기도 물어봐여. 다 곧잘 하고 내 생년월일 또박또박 말하는 거 보더니 ‘어르신은 치매끼도 없고 괘안십니더’ 하더라. 읍에 한번 나가면 아까우니까 장 다니는 성모병원도 가고 눈 때문에 연세안과도 가고 꼭 일을 두세가지 다 보고 오고마는. 치매 예방엔 글쓰는 기 좋다고 매번 갈 때마다 ‘우짜든지 계속 일기 쓰시다’ 하더라”
지난해인 2018년 4월 18일의 일기를 들려준다. 아내가 췌장암 판정을 받고 온 식구가 뒤집어졌다고 한다. 다행히 온 식구가 나서 아산병원에 모시고 가 수술과 항암을 진행, 잘 회복해가고 있다고 하셨다. 정민기 어르신은 “처음 췌장암이라는 소리 들었을 때는 얄구지 암이면 좋으련만 어렵다는 췌장암이 왔나 싶어 덜컥 겁이 딱 나드만 다행히 딸 친구가 아산병원에 있어 빨리 일이 돼 수술도 잘 했다. 초기에 발견된 게 천만다행이라 하더라. 6남매 자식들 키울 때는 눈물 쏙 뺐지만 지금은 자식들 힘으로 살제. 자기들끼리 딱딱 당번을 정해서 주일마다 소고기 사와, 전복 사와, 지 엄마 살린다고 참 잘하는구만. 맨날 전화로 암환자는 잘 먹고 살빠지모 안된다고 매일같이 몸무게 쟀느냐는 전화가 딱딱 오고만”
정민기 어르신의 일기장엔 삶의 구성진 사실과 비밀이 오롯이 들어있다. 
비료값을 안 낸 것 같다는 농협의 연락을 받고 “내가 일기장을 가지고 내려갈게”해서 일기 속 기록을 통해 오해를 푼 일과 최근엔 적금을 정리해 딸 넷에게 각 2000만원씩 정리해준 일들이 그러하다.
“눈이 좀 불편한 것과 허리 아픈 거 말고는 다 괜찮아. 허리 아픈 것도 신경 쓰고 경운기 몰면 안 아파. 말짱해. 그래도 내가 이리 말짱할 때 주변 정리는 하나씩 하는 게 좋지 싶어서 그랬지. 내 나중 갈 때 이 스무권 넘는 일기가 동무가 돼 주겠지 싶어 흐뭇해. 이 좋은 세상에 얄구지 살면 안 되지. 맘 상할 거리 만들 일도 없고, 안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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