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철명상디자인학교 교장
박 철명상디자인학교 교장

가을의 햇볕이 너무나 따뜻합니다. 창문 안과 밖을 동시에 비추는 십일월의 햇살. 그 햇살 하나라도 놓치기 싫어 얼굴을 창가에 살며시 기대어봅니다. 포근하게 다가오는 빛의 감촉이 너무 좋습니다. 사계절 내내 반가운 햇볕, 그의 여정은 사실 가장 먼 곳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아주 가까이, 마치 곁에 있는 절친한 친구의 마음처럼 한없이 따뜻하기만 합니다. 항상 둘이 아니요 하나인 것처럼, 멀리 있으면서도 멀지 않은 것처럼, 늘 그렇듯이 항상 똑같은 양으로, 똑같은 질서 속에서 만물의 생성을 돕고 있는 것입니다. 사계절 내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어떻게 이처럼 신묘한 작용이 가능할까요? 자연발생적이라고 해도 헤아리기 어려운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날마다 기적을 행하고 있는 햇볕, 사실 우리는 그 고마움을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햇빛을 보며 우리가 이 가을에 담아내야 할 담론은 보통의 상식이 아닌 한 차원 높은 주제로서 다루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담아서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행여 이러한 주제라면 어떻겠습니까? 자연은 우리에게 엄청난 혜택을 주고 있는데 우리는 그들에게 과연 무엇을 주고 있는가? 부분이 전체요 전체가 부분을 반영하듯이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가? 쪼개고 나누고 불신하는 풍조가 아니라 나누고 위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두가 하나가 되는 위대한 역사를 창조할 수는 없는가? 생명의 실체와 흐름을 존중하며 그 결대로 살아가는 것은 어떠한가? 이러한 담론에서 우리와 가장 친숙하면서도 무한한 사랑을 나누어주는 나무를 생각해 봅니다. 가장 구도자적인 행보를 보이면서도 사시사철 내내 우리에게 많은 혜택을 주는 나무는 삶의 정신적 지주로서 우리를 이끌기도 합니다. 한 나무에 생(生)하는 뿌리, 줄기, 가지, 잎, 열매는 부분과 전체가 공유하는 삶을 유지합니다. 거기에는 어떤 욕심도 없습니다. 많이 가지려고 누구를 미워하거나 시기의 감정을 띠는 일도 없습니다. 사시(四時) 내내 욕망에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그 순연한 본성의 가치란 비우고 버리고 낮추는 데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말이 필요 없이 전체가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현명하게 공유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전체와 부분이 공존하는 질서 속에는 음과 양이 조화롭게 생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일이 없습니다. 이미 생물학적 기능이 퇴화한 인간의 성정에서 보면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습니다. 어느 시기부터인가 양의 기세와 음의 수렴이 무너지면서 인체에 미치는 영향 역시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밝음과 어두움이 교차하는 가운데 인간의 생물학적 감각도 밝아야 할 때는 밝아야 하고 어두울 때는 어두워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낮과 밤의 교차가 아니라 밤이 낮이 되고 낮이 밤이 될 형국이라면 이보다 더 난감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 입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에 알맞은 생태적, 생물학적 감각 또한 어긋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사라지고 빛이 없으면 어둠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양자는 상호 보완이요 상생의 관계입니다. 한쪽이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를 얼마나 아름답게 조화시키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이러한 논리에 익숙하지 않아도 금후 시대에 우리가 추구해야 할 담론은 음과 양, 어두움과 밝음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더 깊은 차원에서 바라보면 내가 양적, 음적으로 대상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대상이든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는 지혜입니다. 이미 내가 아닌 것(시기, 원망, 혈기, 자존심, 분노, 근심, 걱정, 불안, 초조 등)을 넘어 더 새로운 차원으로의 모색입니다. 자기 자신을 자각하면서 착각, 망상, 집착, 부정의 생각을 개입시키지 않고 전체적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안으로 천착할 동(動), 정(靜)의 기운 속에서 우리가 이 가을에 담아내어야 할 진정한 가치는 고요하고 순수한 본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순수한 본성이 바로 나이며 이때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신이 올바르게 성립됐다고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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