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유배문학관 대강당에서 지난3일 전)남해유배문학관장이었던 김성철 씨가 제10회 김만중문학상, ‘유배문학특별상’을 수상했다. 그는 이날 수상소감을 통해 “남해에 내려온 지 23년째가 되었다. 김만중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하면서 ‘서포기념사업’을 하고 유배에 관한 글을 많이 써서 이런 상을 받게 된 것 같아 기쁘면서도 어깨가 무겁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다”고 짧고 명징한 인사를 했다. 서울에서 ‘씨티플랜’ 출판사를 운영하며, 인쇄∙출판∙기획∙광고 업무를 왕성하게 했던 그는, 어느 날 지인의 간곡한 부탁으로 1997년에는 완전히 남해로 귀향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오랫동안 출판업을 하면서 다양하게 익힌 노하우를 바탕으로, 남해관광지도 남해관광책자 등을 발간하며 문화관광 분야의 견인차 역할을 충실히 했다. 이외에도 곳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그를 만나 그동안 남해의 역사를 만들어갔던 길을 따라가 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어린 시절 기억나는 일들이 있다면
동국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지만 사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미술∙디자인, 예능 쪽에 더 가까운 아이였다. 초등학교4학년 때는 수채화로 경남매일사생대회에서 최우수상을, 판화부문에서도 대상 수상, 남해대교개통1주년 사생대회에서 목 조각으로 대상을 받기도 했다. 중고등학교 때는 ‘구성’으로 경남대회에 자주 나갔다. 미술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고 홍익대 미대를 가려고 했지만 부친이 말려서 결국 못 갔다.

▪남해로 오기 전 서울에서 어떤 일들을 하셨는지 
대학 졸업 후 20대였던 87년에 ‘도서출판깊은샘’에서 2년 정도 근무를 하고, 출판사를 독립운영하다 남해 내려오기 전에는 ‘씨티플랜’으로 인쇄∙출판∙기획 광고 업무를 꽤 잘하는 출판사로 명명되어 일거리들이 많았다. 도서출판깊은샘에서 납월북작가 납본필증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받아내기도 했다. 1990년 컴퓨터가 없던 시절에 서울에서 남해정론 주재기자로 일하며, 신문을 만들어내었고, 남해신문과 남해정론이 통합됐을 때는 남해주재기자 취재부장으로 활동을 했다. 1997년 남해로 완전히 내려오기 전에는 서울과 남해를 오가며 남해관광지도와 남해관광책자를 발간하기도 했다.

▪서울과 남해를 오가면서 이룬 업적들이 많을 줄 안다. 자세히 알려주신다면
IMF가 오기 전 남해에 있는 지인들이 지역을 위해 일해 달라는 권유를 하여, 고민 끝에 남해로 오게 되었다. 조금 전에 말했다시피 지자체 발전을 위해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처음으로 만든 게 남해관광지도였다. 역사∙문화가 모두 불모지였을 때여서 우리가 만든 컬러로 된 관광지도는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때 방송국에서 경상도에서는 이 지도가 최초로 나왔다고 소개를 하기도 했다. 남해에 완전히 정착하기 전에는 금요일에 남해로 내려와 토∙일요일에 사진을 찍으러 다니고 조사를 하고 월요일에 서울로 올라가는 일의 반복이었다. 1년에 50번 정도 남해와 서울로 오가면서 100페이지 정도의 책자를 만들어냈다. 이것을 본 철원군∙무주군∙고성군에서도 우리에게 부탁을 하여 책자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이런 일을 서울에서 다 소화해내며 지역을 알리는 데 앞장서자 남해로 와서 빨리 일을 해달라는 권유가 더 자주 들렸다. 
남해로 완전 이사하기 전 남해군에 2000기획단이 1995년 말인가 1996년에 생겼다. 요즘으로 보면 위원회 비슷한 것이다. 2000기획단은 농수축산분과와 문화관광분과 두 개로 나뉘었는데 나는 젊은 나이인 33세에 문화관광분과 자문위원을 맡았다. 그리고 1998년에 지자체장 2선이 조직되자, 2000기획단이 21세기 남해군발전위원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제일 먼저 남해관광발전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깊이 고민하다 문화관광해설사를 만들어내자는 생각으로 군에 건의를 하여 1999년 6월에 제1기 남해군관광도우미에 위촉되었다. 

▪1997년 남해로 온 이후 초창기에는 어떤 일들을 하셨는지 
지역을 위해 급선무로 여긴 문화관광해설사를 양성하고 있을 때 2002년 월드컵을 대비해 2001년에 해설사를 뽑게 되었다. 남해에서는 이미 해설사가 준비되어 있었기에 남해해설사6명은 경남에서 제일 잘하는 해설사들이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었다. 2002년 월드컵을 할 때는 덴마크에서 전지훈련을 위해 남해스포츠파크로 선수들이 왔다. 그때 2002년 월드컵관광객 유치단장을 맡기도 했다. 또 생각나는 게 2000년 6월에 남해리뷰를 창간하여 남해리뷰21호까지를 출판하고 예산부족으로 접게 된 일이다. 그 책에는 남해의 역사∙문화∙관광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로 담겼다. 나는 그런 책을 만들며 그렇게 30대를 보냈다. 

▪제10회 김만중문학상, 유배문학특별상을 처음으로 수상하셨는데 
문화사랑회 활동을 하다 김만중 선생에 대해 무엇인가를 해야 했다. 그래서 1998년에 ‘서포 김만중 남해기념사업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서울 대전으로 답사도 다니고 서포 김만중 선생 영정도 찾아 사진도 찍어왔다. 군의 지원을 받아 2002년 7월에 첫 학술대회를 열었고, 첫 창립 세미나도 가지면서 유배문학에 대한 글을 썼다. 인터넷에 글도 올리며 김만중과 남해유배문학을 알렸다. 2009년과 2010년에는 ‘서포김만중과 남해’ 2011년에는 ‘남해문화유산답사기’도 편찬했다. 남해읍지 삼동면지를 만들면서 유배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도 썼다. 남해읍 발전위원회 사무국장을 할 때는 경상도 전라도 중 우리와 엇비슷한 지역들을 찾아다니며 사진도 찍고 현황들을 조사하여 100페이지 분량의 보고서를 만들기도 했다. 읍내 사거리 디자인을 할 때 호국거리∙명승거리∙유배거리 이런 식으로 나뉘어서 유배에 관한 콘텐츠 4분의 1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지나고 나니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유배거리와 남해유배문학관 건립을 제안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잘한 일로 여겨진다. 4년 동안 남해유배문학관장을 하면서 유배에 관한 글을 남해시대신문에 156회 연재를 했다. 그때 썼던 글을 다시 정리하여 곧 책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나의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면 유배와 꽤 인연이 깊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운 좋게 상을 받게 되어 기쁘지만 그 옛날 설립하려다 중단된 ‘한국유배학회’에 대한 고민을 다시 한 번 해보고 싶다. 

▪그동안 역임했던 일과 현재 역임하고 있는 일은
남해문화원 부설 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 편찬위원장과 부소장을 역임했다. 남해읍지∙삼동면지 책임집필위원, 남해향교 사무국장, 남해서복회 사무국장,(사)남해생태관광협의회 대표이사와 회장, 경남관광문화해설사 이사, 경남방언보존연구회 감사도 맡고 있다. 남해 제1기 문화관광해설사, 경남 제5기 문화관광해설사로도 활동하고 있고, 간간이 출판업무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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