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하지 않는 끝없는 도전정신을 말할 때 ‘백절불굴’의 정신이라고 하며, 인간의 한계를 경신(更新)하는 모든 분야에서 지금도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
발명왕 에디슨은 5백 번 이상 실패를 해도 포기하지 않고, 도전에 또 도전하였다고 회고했다.
비슷한 성어로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 난다’는 오뚜기정신의 ‘칠전팔기(七顚八起)’와 ‘수 없이 꺾여도 굽히지 않는다’는 ‘백절불요(百折不撓)’가 있다.
실패했다고 낙담하고 좌절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살다 보면 당연히 실패할 일도 있으며, 실패도 우리의 삶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 한(漢)나라 때 교현(撟玄)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청렴하고 강직하며 악(惡)을 원수처럼 미워하였다. 
그가 관직에 있을 때 부하직원이 법을 어기자 즉각 사형에 처하였으며, 또한 태중대부(太中大夫) 개승(蓋升)이 황제와 가깝다는 것을 믿고 백성들을 착취(搾取)한 사실을 적발하여 처벌하도록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病)을 핑계로 사직(辭職)하였다. 그 후 황제가 태위(太尉)라는 벼슬을 내렸으나 응하지 않았다.
어느 날 교현의 어린 아들이 강도들에게 붙잡혀 가자, 양구(陽球)라는 장수가 즉시 병사를 데리고 구출하러 갔다. 하지만 병사들은 교현의 아들이 다칠까 봐 강도들을 포위하고만 있을 뿐,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이 사실을 안 교현은 “강도는 법을 무시하고 날뛰는 무리들이다.”라고 화를 내면서 빨리 잡으라고 다그쳤다. 
결국 강도들은 모두 붙잡혔으나 교현의 아들은 강도들에게 살해되었다. 사람들은 악에 대항하는 교현을 존경하게 되었고, 후한(後漢) 말기의 학자였던 채옹(蔡邕)이 악을 원수처럼 여기며 강직하고 청렴하게 살았던 교현이란 사람을 기리며, 태위교현비(太衛喬玄碑)라는 비문에 ‘유백절불요(有百折不撓) 임대절이불가탈지풍(臨大節而不可奪之風)’ 즉 백번 꺾일지언정 휘어지지 않았고, 큰 절개에 임하여서는 빼앗을 수 없는 풍모를 지녔다.”라고 칭송한데서 유래하였다. 올곧게 살아가는 사람을 표현할 때 존경과 신뢰를 담아 하는 말이다.
옳지 않은 일이나 사람과는 절대로 타협이나 뒷거래는커녕 어떠한 권력에도 굴하지 않고, 청렴하고 강직하고 충직하게 사는 사람을 가리킬 때 저 사람은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휘어지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뻣뻣해 봐야 부러질 수밖에 없으니, 적당히 비켜설 줄도 알고 휠 줄 알아야 세상을 잘 사는 것? 이라고 하니, 요즘은 그런 사람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정작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겉으로는 존경하는 척 경의를 표현하면서도 뒤로는 딴 짓을 하며, 해코지하기가 일쑤이니 세상 살아가기가 정말 힘든 지경이 되고 말았다.
어쩌면 사회에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고자 한다면 세태에 적응할 줄도 알고, 그것이 진정 나쁜 일이 아니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아니라면, 각자 이익추구를 위한 방향으로 서로의 뜻을 절충하며 살아갈 줄도 아는 것을 요즘의 시각으로는 갈등과 다툼을 잠재우고 바람직하게 사는 방법이라고 한다.
부러지기보다는 휘는 걸 더 좋게 바라보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나약하기 그지없는 현대인들에게 타협보다는 극복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려 주는데, 한 소설의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다(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teated)’는 문구처럼 절대로 굽히지 않는 ‘백절불굴’의 정신을 가리키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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