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천문봉에서 마음에 담은 천+지 

처음에는 북파와 서파 두 코스를 모두 오른다고 했다. 어찌된 일인지 갑자기 서파 코스는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어쩌랴. 그냥 따라 나설 수밖에…. 
오늘은 오로지 백두산이다. 백두산으로 가는 길 양옆에는 오로지 옥수수밭 뿐이다. 그리고 정상이 가까워오자 화산재로 뒤덮인 황량한 땅에 관목이 조금 있을 뿐이다. 며칠 전에 눈이 내렸다고 하더니 음지에는 드문드문 하얀 눈이 쌓여 있다. 12명씩을 태운 지프차는 무서울 정도의 속도로 해발 2679m의 천문봉 정상을 향해 폭주한다.
해발 2750m로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 백두산. 그 산정에 있는 천지는 화산폭발과 함께 화구가 함몰하여 이루어진 칼데라호다. 천지의 총저수량은 20억 톤, 70%는 빗물, 30%는 지하수가 솟아 오른 용천수라고 한다.
우리 민족에게 백두산은 단군왕금으로 시작되는 역사의 기원으로 인식되고 있다. 부여, 고구려, 발해가 백두산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 뿐이랴! 거란족, 말갈족, 여진족, 만주족 등 백두산 인근 대부분의 민족이 성산으로 숭앙하고 있다.
머리가 하얀 산 백두의 하늘은 너무 맑았다. 1년 중 이런 날씨는 10여 일에 불과하다는 말과 3대가 덕을 쌓아야 천지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가이드의 말에 내남없이 자기자랑 일색이다.
우리 일행 26명 중 3대에 덕을 쌓은 사람이 많기는 하나 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할머니와 아버지 등 조상들의 음덕에 고마움을 느낄 뿐인가? 어쨌든 우리는 단번에 백두산에 올라 천지를 보는 호사를 누렸다. 
하지만 나는 우리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을 중국 땅을 통해 올라야 하는 현실이 비감스러울 뿐이다. 누군가는 통일이 되기 전에는, 아니 북한을 통해 통로가 열리기 전에는 백두산을 오르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고 한다. 
그들의 민족정신은 분명 높은 가치가 있는 민족자존의 발로였을 것이다. 하지만 서럽다 서럽다고 현실을 외면하지 못하는 우리 민초들을 손가락질 하지는 말아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그 날이 오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 민족의 역사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기에…. 애써 위안을 하며 천천히 북파 A코스와 B코스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다. 용솟음치는 탐방객의 마음을 담은 파도가 천지에 물결을 일으켰으면 좋겠다. 하지만 하얀 구름을 까맣게 담은 푸른 천지는 너무나도 조용히 나를 반길 뿐이다. 

1909년 일본이 독단적으로 남만주철도부설권을 얻는 댓가로 청나라에게 간도를 넘겨 버린 간도협약. 그것은 대한제국 정부와 협의하지 않은 불법이었다. 그리고 1962년 김일성과 주은래가 평양에서 만나 조·중 국경조약을 맺었다. 중국의 압력으로 백두산과 천지의 일부를 떼어주고 간도협약에 면죄부를 준 것이다. 
김일성이 중국 총리 주을래에게 백두산을 팔아먹을까? 아니면 북한의 주장대로 백두산을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중국과의 회담에서 천지 한복판에 경계선을 긋기로 하고 백두산 북쪽땅을 양도 받아낸 것일까? 어쨌든 중국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모택동의 두뇌 역할을 한 주을래의 망동에 개탄할 따름이다. 
백두산을 내려온 우리 일행은 장백폭포와 주변의 온천지대를 1시간 동안 둘러보았다. 옛날 우리 민족은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닮아 비룡폭포라 불렀다. 68m 수직벽을 때리며 떨어지는 물은 송화강의 원류가 된다. 영하 20도가 넘는 기온에도 얼지 않고 폭포수는 언제나 따뜻하다. 
백두산이 중국인들에게는 장백산이니 장백폭포지만 우리는 비룡폭포라 불러야 옳지 않겠나 싶다. 폭포에서 내려와 하나만 먹어야 한다는 온천 달걀을 하나씩 사 먹었다.  소천지와 녹연담을 둘러본 후 첫날 유숙지였던 통화시 호텔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늦은 밤이었지만 우리 경남문화관광해설사 아라리오기들은 여행에서의 회포를 풀면서 새롭게 단합된 모습으로 멋진 해설사가 되기로 다짐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심양에서 잉태한 비극의 씨앗 그리고 삼전도의 치욕

청 태조 누르하치는 8기제도를 만들었다. 그는 요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다시 심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리고 국호를 후금으로 천명하여 12세기 여진왕조를 계승했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영원성 전투에서 패하고 그때 입은 상처 때문에 1626년 사망했다. 
그의 아들 황태극[홍타이지]은 청 태종으로 아버지의 대업을 완성했다. 1644년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철천지원수일 수밖에 없었다. 바로 병자호란을 통해 우리 민족사에 굴절의 역사를 적게 했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이 마지막으로 찾은 심양은 청나라의 고궁이지만 민족사의 비극을 간직하고 있다. 명나라와 청나라간의 싸움에서 중립외교를 펼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반정을 일으킨 의도와는 달리 인조는 명나라의 편을 들다 결국 청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남한산성에서 끝까지 저항하다가 항복한 후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와 봉림대군 그리고 김상헌과 최명길, 수많은 조선인들의 혼이 담긴 심양은 나에겐 서러움보다 더 진한 비극의 역사 그 자체였다. 

남해에서 태어나 지금도 남해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는 심양에서 김익겸, 김만중 부자를 보았다. 강화산성의 함락과 함께 순절한 아버지 김익겸과 삼전도의 치욕 후 일주일 후 태어난 김만중. 그리고 서포는 유배지 남해에서 생을 마감하였으니….
고궁을 떠난 우리는 황제광장으로 갔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개발에 치여 패인 흔적만 남아 있을 뿐. 이제는 4일째 중국 여정의 마지막 답사지 서탑거리에 도착했다.
소현세자 등이 유폐되어 있던 곳에 조선인들이 하나둘 모여 들어 살았던 서탑거리는 한국어로 된 간판들이 꽤 많았다. 평양관, 현풍할매국밥집, 신사임당떡집 등 반중반한의 거리였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복발형 탑이 서 있었다. 그것이 바로 서탑이다. 
심양의 코리아타운 서탑거리는 400년의 역사 속에서 우리 한국인의 정서를 잃지 않고 영원히 존재해야 할 것이다. 언젠가 다시 이 땅을 밟는 날에는 좀더 오래 머물면서 그들을 만나고 싶다. 

에필로그

굿바이 심양!
오늘밤이 지나면 일어나자마자 심양공항으로 떠나야 한다. 그리고 내 고향 남해에서 언제 그랬느냐는 듯 일상의 삶을 살아가겠지.
하지만 민족의 뿌리를 찾아 떠났던 답사여정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교훈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내 여행은 즐거움이 별로 없고, 눈요깃거리도 그다지 없는 역사기행 뿐이었다. 역사를 찾는 여정의 참맛은 가슴 깊이 쌓이는 감동이다. 
답사기를 쓰는 지금도 나는 고구려의 땅 만주벌판에서, 백두의 산정에서, 심양의 고궁에서 우리 선조들의 가슴을 부여잡고 5천 년 역사를 이어오게 만든 질긴 생명력에 경의를 표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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