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권 전)국제신문 기자는 직장생활을 하는 것도 아닌데 한결같이 남해초 37회 동기회 사무실로 오전에 출근하고 오후에 퇴근한다. 누가 관찰하고 감시하는 것도 아닌데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정갈한 모습으로 어떤 일에도 실수하지 않고 후회하는 일은 남기지 않겠다는 각오로 모든 언행에 빈틈을 보이지 않는다. 부산 항도고등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중앙정보부에서 8년, 남해 해성고에서의 교사직 이후, 단 한 명 채용하는 국제신문 남해주재기자에 뽑혀 22년 동안 언론인의 길을 올곧게 걸어왔다. 영국에서 막 건너온 듯한 노신사의 깔끔한 이미지가 물씬 풍기는 그는, 기자로 활동하던 중 ‘한려수도를 지키자’는 획기적인 보도를 10회 연재하여 1991년 8월 제11회 ‘이달의 기자상’에 이어, 이듬해인 1992년 8월 17일 제24회 지역언론부문 한국기자상을 수상했다. 1947년 국제신문이 창간된 이래, 최초로 한국기자상의 영광을 안겨주었던 그는, 국제신문의 중차대한 인물로 인정돼 회사에서는 종신기자로 남아 달라는 부탁을 했다. 하지만 다른 직원과의 형평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결국 떠나게 되었다. 기자시절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생활의 동력으로 삼고 있는 그는, 지금도 사무실에서 국제신문을 꼼꼼히 읽으며 많은 더듬이를 움직이고 있다. 간간이 사무실로 방문하는 망운회(남해초37회동기생들의 모임)회원들과 환담을 나누며 규칙적인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이 모든 것은 아마도 그의 굳건한 어떤 철칙 때문일 것일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끝까지 절제된 감정으로 자신이 걸어온 역사를 진솔하게 전하는 그의 어투에서 저절로 경건한 마음이 우러나 간만에 대인을 만난 듯한 기분을 갖게 했다.             -편집자 주

초등학교 5학년 때 경남중학교의 모자착용으로 생긴 일화
방학이 되면 아버지와 함께 친척이 살고 있는 부산으로 가곤 했는데, 초등학교 5학년이던 어느 날 경남중학교의 모자가 너무나 갖고 싶어 아버지에게 사 달라고 졸랐다. 키도 크고 덩치도 컸던 그는 아버지가 사 준 그 모자를 자랑스럽게 쓰고 학교가 파하면, 하마정에 앉아 있곤 했다. 그때마다 그곳을 지나가던 고현∙설천중학교 1학년들이 모자를 쓰고 있는 그가 선배인 줄 알고 거수경례를 했다. 그것이 재미있었던 그는 자주 그곳에 앉아 지나가는 학생들의 인사를 받곤 했다. 경남중학교의 모자와 교복이 마음에 들어 그 학교로 진학하고 싶었지만 막내였던 그는 어머니의 만류로 가까운 남해중학교로 갈 수밖에 없었다. 멋쟁이 기질이 강했던 그는 어릴 때부터 옷을 멋지게 잘 입어 남으로부터 주목을 받았고, 고등학교 때도 제일 멋을 내고 다녀 교장선생으로부터 “멋 좀 그만 부려”라는 질책을 받기도 했다. 그 당시 미제군복을 뜯어서 검정색 염색을 하여 PWO가 선명하게 나타나던 옷이었고 하얀 교복 칼라 안에 검정 빌로드 머플러까지 착용하고 있었으니, 그런 말들이 쉽게 나올 법했을 것이다. 지금도 멋진 노신사의 품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그 옛날부터의 멋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를 생각했다. 

대학졸업 후 가진 직업들 중 기자가 제일 적성에 맞아
24살 군복무를 마치면서 동아대 법대도 함께 졸업을 했다. 졸업 후 부산 항도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을 때 결혼을 하였고 이후 중앙정보부8년 남해 해성고등학교에서 3년 정도의 교편을 잡기도 했다. 건강이 별로 좋지 않았던 관계로 교사생활을 접고 몸을 좀 보한 후, 다시 잡은 직업이 기자였다. 주변의 지인들이 국제신문 남해주재기자를 뽑고 있으니 한 번 도전해 보라는 권유를 몇 번이나 하여 떠밀려 국제신문 본사로 가게 되었다. 남해에서 올라온 지원자들과 경쟁을 치른 후, 당당히 1명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는 각 마을에 있는 상징물들을 찾아 보도하는 일들을 하면서 마을 이장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모았기에 구독자 수도 많이 확보할 수 있었다. 그 당시 부산일보 국제신문 경남매일 경남신문 경상일보의 주재기자들이 남해에 있었는데, 그 중에서 국제신문의 위상이 제일 높은 편이었다. 그는 몇 가지의 직업을 가져본 결과 기사 글을 채취하고 글을 쓰는 기자 일이 제일 적성에 맞아 오래할 수 있었다고 했다.

한국기자상을 받은 후 종신기자 권유, 본인 반려
그가 제2사회부기자로 있을 때 한려수도 일대의 섬들이 토석채취 수목훼손 등으로 주변경관이 손상당한다는 정보를 듣고 이 사실을 지역사회에 고발하여 환경보호에 크게 기여한 점이 인정돼, 1991년 8월 이달의 기자상을 1992년 8월 17일 한국기자상을 수상했다. 한려수도인 부산(성포)・통영・고성・삼천포・사천・하동 등을 취재하여 1회씩 연재했고 남해에서는 4회에 걸쳐 연재를 했다. 창선면 적량에서 플랜카드를 들고 ‘한려수도를 지키자’는 시위를 하여 사진으로 나오기도 했다. 
국제신문은 창간 이래로 역사에 남을 한국기자상을 받아 회사의 명예를 드높인 그를 종신기자로 두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퇴임하는 날 국제신문 사장이 “이태권 기자는 국제신문 50년 역사 속에 한국기자상을 최초로 만들어냈다. 정년은 오늘까지이지만 이 기자가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기자생활을 해 달라”고 부탁하며 특별히 정년을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주변에 있던 다른 동료 기자들이 정년퇴직을 하면서 “누구는 왜 종신기자로 두느냐”는 반발이 있어, 회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냥 무시하고 회사의 제안을 받아들여 기자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지만 혼자 혜택을 받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어려운 결정을 하고 말았다.

기억에 남는 일과 기자들에게 바라고 싶은 것 
그가 기자를 하던 시절에는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각 마을 이장을 찾아가 그런 사람이 있는지를 알아보던 중 이동면 화계에,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이 어려움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갈화에도 어려운 가정의 아이가 있다는 내용을 접하고 그것과 관련된 기사를 썼다. 마침 거창에서 양복점을 하던 어떤 사람이 돕고 싶다는 마음을 전하며 많은 양의 쌀을 보내준 적이 있다. “우리 기자들도 사회적 약자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살펴서 세상에 드러내야 하고, 남해군정에 바라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군수를 만나 자신의 의견을 전하고 빨리 돌아 나와야 한다. 혹시라도 시간을 끌면 자칫 잘못된 느낌을 주게 되기 때문이다”고 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그가 기자시절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간파하게 했다. 그는 지금 기자신분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도 영원히 기자신분으로 살아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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