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숙(남해문화원 사무국장·소설가)
김미숙(남해문화원 사무국장·소설가)

중종 27년(1532) 자암은 유배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정희철은 자암의 몸과 마음을 가뒀던 13년의 길고 긴 유배가 풀린 것이 기뻤다. 그는 자암이 조정에 다시 나가 큰 뜻을 이루길 누구보다 바랬었다. 하지만 강금이가 슬퍼할 것을 생각하니 좋은 것만은 아닌 듯했다. 
지난 세월동안 강금이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자암을 깊고 환한 미소로 바라보았다. 정희철은 강금이의 이런 모습을 바라보며 복잡 미묘한 감정에 빠지곤 했다. 하지만 품성이 어진 희철은 그가 사랑하는 이들이 행복한 것이 좋았다. 항상 먼발치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연이를 사랑하는 그의 마음은 늘 외로웠다. 하지만 그 마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자암은 그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형님, 저는 내일 한양으로 돌아갑니다. 연이를 데려갈 수 없는 저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겁니다. 건강을 잃은 지도 오래되었고 죽음이 눈앞에 서 있는 것 같아 두렵습니다. 함께 갔다가 제가 세상을 먼저 뜨기라도 하면 불쌍한 연이는 삶을 포기할 겁니다. 연이를 잘 부탁합니다. 형님과 제가 함께 사랑한 여인입니다.”
자암은 5년 전부터 병세가 악화되어 건강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었다. 연이는 지극 정성으로 자암을 돌보았다. 연이는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 준다는 금산 보리암에서 백일기도를 올렸다. 정희철은 지리산 깊은 골에 있는 산청에 가서 귀한 약재를 구해 오기도 했다. 자암은 연이와 정희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력이 회복되지 않았다.
자암은 13년이란 세월을 남해에서 보냈다. 세상에 대한 모든 욕망을 미련없이 남해바다에 던져 버렸다. 싸늘하고 흐린 날씨 탓에 집집마다 뿜어내는 땔나무 연기가 인기척 없는 섬마을에 내려앉아 떠나는 이의 마음을 심란하게 했다. 남해를 떠나기 전 자암은 아픈 몸을 이끌고 귀한 종이를 선물한 화방사 주지스님을 만났다. 자암은 산사에서 흩어진 마음을 다스리고 정희철의 도움으로 간신히 마을을 지나 산을 내려왔다.
이루지 못함에 대한 집착을 온전히 버리지도 못하고, 연이를 두고 떠나는 아픈 맘에 대한 집착도 버리지 못하고, 그 무엇도 버리지 못하고 자암은 또 떠나야 했다.
13년 전 가물거리는 기억 속 노량 포구에는 꽃비가 날렸었다. 몽환적인 노량 꽃길은 칼날위에 서 있었던 자암의 시퍼런 마음을 살짝 흔들어 놓았었다. 자암이 떠나는 뒷모습에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추억들은 꽃비가 되어 내리고 있었다.
오늘따라 노량 포구 뱃사공이 부산하게 서두르는 것 같아 자암은 야속했다. 노량포구 뱃사공은 수 많은 이별을 지켜보면서 마음에 굳은살이 박혔는지 떠나는 이의 아픔에도 남은 이의 슬픔에도 무심한 듯 보였다. 자암은 힘겹게 물살을 가르며 떠나는 이 배만큼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길 간절히 바랬다. 자암의 도포자락에 떨어지는 꽃잎이 아프고, 이 꽃잎이 연이의 눈물인 것 같아 자암은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자암은 멀어져 가는 연이를 차마 볼 수 없어 애써 외면하며 돌아서 앉았다. 자암의 하얀 도포자락 위로 꽃잎은 슬픈 미소로 쓸쓸히 날리고 있었다. 연이는 멀어져가는 자암을 바라보았다. 자암을 떠나보내는 연이의 눈망울에는 미쳐 맺혀 떨어지지 못한 슬픔이 고여 있었다.
‘마음이 머문 것이 병이 되었구나! 참으로 지랄 맞은 인생이구나! 아비는 바다를 건너기도 전에 피투성이가 되어 세상을 떠나고, 어미는 어린 나를 홀로 두고 눈을 감지 못하고 떠나갔는데…’ 
연이는 몹쓸 세상을 만나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생살을 도려내듯 이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힘없이 빼앗긴 삶도 억울한데, 맘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새로운 이별이 그녀의 가슴을 도려내고 있었다. 그녀의 삶을 짓눌렸던 이별의 아픔이 굳은살이 되어 아리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녀의 맘은 아픔으로 휘청거리고 있었다.
연이는 살아서는 다시 보지 못 할 자암을 허공에 그려 보았다. 간결한 말 속에 품은 자암의 따뜻한 마음이 좋았고, 진한 눈썹과 고운 눈이 선하여 웃는 모습이 좋았다. 수줍은 듯 입맞춤을 할 때 자암의 곱게 뻗은 콧날과, 고집스럽지만 부드럽게 다문 입술이 그녀를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올 때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던 지난 날이 연이는 행복했다.
함께했던 자암과의 기억이 연이의 얼굴을 복숭아꽃처럼 피어나게 했다. 8년 전 자암과의 첫 날밤은 뼛속까지 파고 든 연이의 외로움을 가져가 버렸다. 능절의 아픔에서 피어난 달콤한 속삭임에 연이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자암의 몸과 마음이 연이와 하나 되는 순간 그녀는 비로소 여인이 되었다. 한 남자의 연인으로 더 이상 외롭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연이는 내일이면 또 다시 이 섬에 혼자 남게 된다. 싸늘히 식은 어머니의 품이 연이를 떠났고 넓고 따뜻한 자암의 품도 내일이면 떠날 것이다. 연이는 자암이 만들어 준 새로운 세상이 자신의 곁에서 사라질까 눈을 뜨지 못했다. 아니 시간이 멈추길 빌었다. 혹시나 자암이 그녀의 곁을 떠날까봐 그의 숨소리가 느껴지는 무릎에 누웠다. 연이의 눈물이 자암의 옷을 적시고 있었다. 자암의 따뜻한 손길이 연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자암의 거친 숨소리가 아팠지만 이 또한 그녀가 사랑하는 자암의 모습이었다. 연이의 가슴에는 자암과 보낸 시간이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연이는 자암과 함께 한 남해섬에서의 추억이 모진 세월 속에서 흐려질 순 있겠지만 자신의 가슴 속에 박혀버린 또 하나의 이별을 삼키고 삼키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연이는 잠들어 있는 자암을 바라보며 새벽을 맞이하고 있었다. 연이는 노량포구에서 멀어져 가는 자암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암, 바다와 하늘이 하나 되어 푸르고, 꽃밭등의 꽃들은 서럽도록 화사한데 내 맘만 시퍼런 멍으로 얼룩져있습니다. 당신이 가는 저 길이 행복했으면 합니다. 병색이 완연한데 몸이 상할까 맘이 상할까 발길을 돌릴 수가 없습니다. 자암, 제가 연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당신은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잘 가셔요. 내 사랑…!
연이는 임 가시는 모습이 보이지 않을까 커다란 눈에 고인 눈물을 닦으며 바라보았다. 연이의 사랑 자암은 눈물이 되어 날리는 꽃잎 사이로 서서히 떠나가고 있었다. 연이의 힘없이 흔들던 가녀린 팔은 방향을 잃었고 눈물 방울이 고이기가 무섭게 떨어지는 눈물은 거문고 시위 위로 서럽게 떨어지고 있었다. 파도 소리와 함께 전해지는 연이의 거문고 소리는 자암의 가슴에 파고 들었다. 
연이가 들려주는 거문고 소리에 편안히 잠들었던 자암.
연이의 집 앞 마당에 매화나무 두 그루를 심어주며 아이처럼 좋아했던 자암.
세상에 큰 별이 되고 싶었던 대유 도련님
연이와 마음을 함께했던 남자…
연이는 그렇게 자암을 떠나보내고 있었다.
당신이 떠난 자리에 소박하고 지루한 일상이 자리 잡겠지요. 요동치던 몸과 마음이 다스려지면 그때는 웃으며 당신을 추억할 수 있겠지요.’
연이는 한 번도 꽂아 보지 못한 어머니가 남긴 옥비녀를 꼭 쥐고 있었다. 그리곤 자암이 떠나간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떠나는 자암과 떠나보내는 연이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한 남자의 머리 위에도 꽃비가 내리고 있었다.
자암을 실은 배는 노량 포구를 떠났고, 저 멀리 누군지 알 수 없는 또 다른 유배객을 실은 배가 노량포구로 쓸쓸이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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