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처음 만나는 옛 고구려의 영토 만주(滿洲). 그 광활한 만주벌판의 아주 작은 땅이라도 밟아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만사 제쳐두고 떠나기로 했다. 뜬눈으로 지새운 밤의 그림자는 잠시 집에 두고 새벽길을 나섰다. 
3시 30분. 남해군 문화관광해설사 4명을 태운 관광버스는 남해유배문학관을 떠났다. 하동군 노량대교 홍보관을 거쳐 서진주 만남의 광장, 창원시 내서터미널에서 경남문화관광해설사들을 태우고 여섯시가 채 못 되어 김해공항에 도착했다. 
8시 30분 심양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2천 년 전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보았다. 고주몽의 졸본성, 광개토대왕, 장수왕……. 그리고 김일성이 주을래에게 팔아먹은 반조각의 백두산과 천지. 후금의 도읍지였던 심양과 인조가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행했던 삼전도의 치욕까지 어느 하나 서럽지 않은 역사가 없지 않았는가? 
요녕성의 수도 심양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심양에서 두 대밖에 없다는 34인승 리무진을 타고 환인(桓仁)을 향해 출발했다. 4박 5일간의 유적답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고구려의 역사가 시작된 졸본성

졸본성!
그 땅은 대제국 고구려의 탄생을 갈망하는 곳이었다. 비록 만주벌 오녀산(五女山) 정상에 굳게 닫혀진 비밀의 문을 지나야 닿을 수 있는 땅일지라도 우리 한겨레의 갈망이 샘솟고 있었다. 경남문화관광해설사의 중국 고구려 유적답사 첫날은 그렇게 열렸다.
동명성왕 고주몽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조강지처인 예씨 부인의 아들 유리를 위해 소서노(召西奴)의 아들 온조와 비류를 버린 주몽의 대서사시가 시작되었던 오녀산산성. 아니 졸본성의 퇴행적 기거는 비록 왜소했지만 처음 찾는 내게는 역사의 웅장한 현장이었다. 세계문화유산 졸본성은 옛 이름을 잃어버린 채 부끄러운 역사와 함께 오녀산산성이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어 있었다.

배가 남산처럼 부른 나에게는 무리하다 싶은 999계단을 지쳐지쳐 걸어 올랐다. 올라도 올라도 끝이 보이지 않는 45도 각도의 끝없는 계단 끝 정상을 향하며 나는 봉래 양사언의 시조를 읊조릴 수밖에 없었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사람은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90도 각도에 이르는 절벽으로 둘러싸인 졸본성은 그야말로 천연의 요새였다. 그 절벽 위의 평평한 산정이 바로 졸본성의 옛터다. 고구려인들은 이 땅에 성을 쌓고 도시를 건설했다. 제2대 유리왕이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었음이 충분히 짐작될 만한 곳이었다. 
산정의 점장대 끝에서 환룡호를 볼 수 있었다. 중국 동북지역 최대의 인공호수는 졸본성 동쪽으로 흐르는 비류수를 막아 만들었다고 한다. 다시 한참 걸은 후 999계단을 내려가야 한다. 요즘 무릎이 별로 좋지 않았기에 좁은 계단을 내려가야 하는 불편함이 곤혹스러웠지만 안 내려갈 수도 없으니 어찌하리오.
힘든 첫날의 일정을 마치고 바이주 한 잔에 피로를 잊고 이렇게 늦은 밤 요녕성과 길림성의 접경에 있는 통화시의 호텔 로비에 걸터앉아 하루를 회상해 본다. 일행의 대부분은 전신맛사지에 발맛사지를 위해 떠났다. 맛사지의 쾌감을 느끼지 못하는 나는 술친구 룸메이트의 진한 코골음에 슬그머니 도망질을 칠 뿐이다.
밤 열시 밤을 향해가는 시곗바늘이 세차게 자정을 향해 회전로타리를 돌듯 돌진하지만 잠들지 못하는 고구려인의 서러움을 마치 혼자 고뇌하는 듯 하염없이 역사의 주변에서 맴돌 뿐…
밤이 깊어 가도 새벽은 오지 않고 아침이 밝아오는 것은 아닌지? 잠 못 이루는 두려움도 이제는 이 작은 도시의 밤에 묻히고 말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광개토대왕과 아들 장수왕의 고구려

둘쨋날 아침은 대충 때울 수밖에 없었다. 호텔 조식이라야 뻔하지 않은가? 2시간을 이동하여 길림성 집안(集安)에 있는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대왕비에 도착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크고 웅장하다. 글씨도 제법 잘 보이는 것 같다. 조성시대를 생각하면 거의 못 알아 볼 것으로 생각했던 것은 착각이었다. 1,775자 중 150자 정도만 판독이 어렵다고 하니 참으로 중요한 역사적 사료가 아닌가?

동방의 알렉스산더대왕으로 불렸던 광개토대왕!
그가 정복했던 요동을 비롯한 드넓은 대륙은 고사하고 비와 묘가 있는 곳에도 어김없이 중국의 감시요원들이 눈을 부라리고 있다. 슬그머니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댈라치면 제지당할 뿐이었다. 
몇 글자라도 읽어볼 깜냥으로 비문을 들여다보았지만 언감생심이다. 그냥 탑돌이도 아닌 비돌이라도 하듯 한 바퀴 돌고 보호각을 벗어나 광개토대왕릉으로 향했다. 

곳곳이 무너져 내리고 파헤쳐진 모습이 처연하다. 유네스코에서 세계유산으로 지정했기에 그나마도 지금의 모습을 간직할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에 미치자 서러움이 앞선다. 이른바 동북공정이라는 미명 아래 우리의 역사가 중국인 그들의 역사로 바뀌어 간다는 누가 목 놓아 통곡이라도 할까?
광개토대왕을 뒤로 하고 장수왕의 왕릉이라고 하는 장군총에 도착했다. 무덤은 총 7층의 단계식 피라미드로 이루어져 있고, 평면은 장방형으로서 높이는 14미터이다. 기단의 무덤 둘레로 한 변에 세 개씩 호석(護石)이라 하는 적석 밀림 방지석이 배치되어 있는데, 분실되었는지 오직 동변만 가운데 호석 없이 두 개뿐이다. 

장수왕은 등극한 지 14년이 지난 후 지금의 평양성으로 수도를 옮겼다. 평양성에서 승하했을 장수왕의 무덤이 광개토대왕릉 주변에 있는지는 미스터리라는 생각을 하며 압록강에 보트를 타러 갔다. 일정에는 없었지만 가이드의 권유로 새로운 경험을 하기로 했던 것이다. 
상류지역이라 그런지 좁은 강 건너는 북녘땅이다. 강화도에서, 임진강 통일전망대에서, 연천 DMZ에서 본 북녘땅과는 전혀 다른 느낌인 것은 왜일까?
지금은 남의 땅이 되어 버린 우리 옛 땅을 밟고 우리 민족이 고통스레 살고 있는 땅을 바라보아야 하는 서러운 여정이 가슴 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저리도 가까이 보이는 평안도 땅에도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는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두만강을 건너 탈북을 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압록강을 건너는 탈북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이곳은 중국땅이요, 그들의 정부가 있기 때문에 다시 잡혀 송환될 가능성이 너무 많아서라고 한다. 그래서 연변 조선족자치구가 있는 두만강을 건넌다고 하니 고향을 버리고 삶을 유지하기 위한 북녘 우리 민족의 애환이 다시 오배랩 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환도산성으로 가는 길에 길림성 집안현 시내에 있는 국내성은 버스 안에서 스쳐 지났다.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 제2대 유리왕은 산 정상의 졸본성을 버리고 평지인 이곳에 수도를 정했다. 하지만 내려서 성돌 하나 만져 보지도 못하고 국내성을 보호하기 위한 환도산성에 도착했다. 

국내성에서 북쪽의 산중에 건설한 환도산성은 적이 침입해 오면 대피했던 피신용성이다. 산의 능선을 적극 활용하여 동 · 서 · 북 3면은 험준한 자연지형을 성벽의 기초로 삼고 부족한 곳에 돌을 쌓아 보충했다. 국내성에서 제일 가까운 정문인 남문을 돌아 들어가면 화강암으로 쌓은 점장대가 있다. 기슭에 자리한 궁전 터는 아쉽게도 밭으로 변해 있었다.
이제 백두산 주변에 있는 송강하로 이동해야 한다. 무려 5시간 이상이 걸린다니 이 무슨 난감한 일인가. 과연 중국여행은 이동시간과 식사시간을 빼면 답사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말을 실감케 했다.   

저작권자 © 남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