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 당선작 중편소설(9) 선도화(仙島花)
신인 당선작 중편소설(9) 선도화(仙島花)
  • 남해신문
  • 승인 2019.09.27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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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숙(남해문화원 사무국장·소설가)
김미숙(남해문화원 사무국장·소설가)

겨울 해풍을 견디고 피어난 매화꽃의 향은 얼어붙었던 연이의 마음을 녹여주고 있었다. 연이는 명주실에 홍매와 백매를 하나씩 걸어 목걸이를 만들었다. 화려한 홍매보다 우아함이 돋보이는 백매의 향이 더욱 진했다. 지난 날 연희방 아씨를 추억하며, 그리고…대유 도련님을 생각하며 만든 목걸이가 예뻤다. 연이는 자암을 바라보며, “치마폭에 꽃을 담아 목걸이를 만들었네요…연희방 어린 시절이 기억나서요…” 연이는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자암은 강금이가 최현대감의 여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단지 연이가 그 사실을 숨기는 것 같아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2년 전 자암은 강금이가 최현대감의 여식이라는 사실을 알고 연이가 남해섬에서 겪었을 고초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또 하나의 커다란 파도가 그를 덮쳐 버리는 듯 했다. 17년 전 최현대감의 여식인 연희방 꼬맹이가 기생 강금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고, 던져진 삶을 힘겹게 버티고 있는 그녀를 지켜주지 못해 미안했다. 매화꽃 목걸이로 대유의 마음을 사려고 했던 귀여운 꼬맹이가 그의 슬픈 연인이 되어 눈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 아프고 시렸다. 지난 세월동안 관기가 되어 이곳 남해에서 외로움과 싸우며 살아왔을 연이를 생각하니 가슴이 무너졌다.
“연이야… 
모진 세월을 어떻게 혼자 보냈느냐…
살아있어 고맙다” 연이를 끌어안으며 자암은 이렇게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자암은 눈을 꼬옥 감았다. 
연이가 살아 온 세월이 아프고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자신이 미웠다.   
유난히 자암의 무릎을 베고 잠들기를 좋아했던 연이에게 자신의 무릎을 내어 주는 것이 그가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었다.  

꽃비되어 나빌레라…
자암은 연이와 남해의 영산인 금산에 올랐다. 자암은 금산 보리암에 올라 자신의 번뇌를 씻기 위해 법당에서 묵상을 하고, 연이와 봉수대에 올랐다. 매해마다 금산 산신제를 지내는 봉수대는 그 입구부터 신성한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한 눈에 펼쳐지는 올망졸망한 섬들과 넓게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비옥한 토양대신 거친 바다와 싸우며 살아가는 남해섬 백성들의 고단한 삶이 눈 앞에 보이는 듯했다. 자암은 철저한 유학자였다. 신진사류들과 함께 성리학은 평생의 이상이며 삶의 실천으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자암은 당연히 조선의 선비라면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해야 하고, 과거에 급제하여 왕에게 충성하고 어버이께 효를 다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암의 머릿속에는 요순과 같은 태평성대를 이루기 위해서는 성리학이 바로서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해 백성들의 마음 속에는 유교의 이념보다 배고픔을 달래기 위한 한 끼가 더 소중했으며, 흰 쌀밥 한 그릇 먹지 못하고 죽은 영혼을 달래고, 풍어와 풍작을 비는 밥무덤제를 지내는 토속신앙이 이들의 삶에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산비탈 한배미 논이라도 억척스럽게 땅을 일구고, 생사를 걸고 뱃일은 하는 이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자연에 순응하고 부처님의 자비로 하루하루를 무탈하게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남해의 거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유학은 사치이며 허세였다.  
자암은 술을 즐기지는 않았다. 부제학으로 있을 때, 벗들과 기방에서 술이라도 한 잔하는 날이면 다음 날 숙취에 시달리곤 했다. 그래서 자암은 술을 멀리하고 학문에 힘써왔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잃고 유일한 벗이 되어 버린 술은 자암의 건강을 해치고 있었다. 남해에 유배 온 몇 해 동안 자암은 이기지도 못하는 술로 세상을 보내며 서서히 건강을 잃어갔다.  
자암은 이생에 이루지 못한 꿈을 다음생에는 부처님의 자비로 이루어지길 바라며, 세상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있었다. 
망운산의 험준한 산세와 기이한 산봉우리는 중국의 남악인 형산을 닮아있었다. 중국의 오악 중 불심이 가장 깊은 곳이 형산이다. 망운산은 형산의 아름다움과 고요함을 닮아 있었고 깊은 골에 자리 잡은 화방사는 평화로웠다. 자암은 천천히 화방사 사찰을 둘러보았다.
대웅전 오른쪽에는 예불 때 사용되는 불전 사물이 중생들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 서 있었다. 불전 사물 가운에 그 형상이 특이한 목어는 장강 동정호 설화 속의 물고기라고 연이가 귀띔해 주었다. 자암은 대웅전 전각의 천정과 벽을 바라보았다. 연꽃이 활짝 핀 물 속에는 물 속 중생들이 그들 나름 존재 의미를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법당 앞마당에 서서 푸른 바다를 내려 다 보았다. 자암이 서 있는 섬 가운데 깊은 산골짜기에 있는 화방사 대웅전에는 남해 바다보다 더 큰 깨달음의 바다가 있었다. 자암은 사찰을 나와 산길을 걸었다. 팔만대장경 목판을 만들기 위해 심어졌던 왕벚나무들의 울창한 숲과 닥나무의 군락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곳이 진정한 불국토임을 자암은 느낄 수 있었다. 아무 말 없이 함께 걸어가던 연이는 애잔한 눈빛으로 자암에게 말을 건넸다.
“자암 선생, 저는 세상의 고단함을 이곳에 내려놓습니다. 저기 보이시죠?” 
연이는 불전사물 가운데 목어를 가리켰다.
“목어는 비움으로 충족하고 만족할 수 있는 무소유를 일깨워 준답니다. 머리는 눈을 부릅뜨고 여의주를 물어 승천하려는 듯하지만 몸뚱이는 물고기의 비늘과 지느러미를 가지고 있지요. 하지만 그 속은 비어 있답니다. 오장육부를 버려서 탐욕을 없앤 수행자의 청빈한 모습을 보여주지요. 무소유를 아는 목어는 남김없이 비운 영혼의 고고함을 노래한답니다. 모든 것을 비우고 온 산천을 울리는 목어의 울림은 중생들에게 비움과 무소유의 깨달음을 준답니다. 분노로 채워진 자암의 마음이 비워지길 원하고 저의 가슴에 가득 찬 아픔이 목어와 같이 비워지길 부처님께 염원 할 것입니다.” 자암은 연이의 말이 아팠다. 자암은 생각했다. 
이제껏 세상에 대한 욕심으로 몸과 마음을 채웠고, 채우지 못함의 분노로 몸이 상했다면, 이제부터는 이것들을 진정으로 비우고 무소유의 충만을 얻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자암은 연이가 지고 가는 세상에 대한 아픔도 승화되길 진정으로 부처님께 염원했다. 자암은 자신의 오만한 지혜를 내려놓기 위해 수행했다. 연이와 함께 아팠던 세월을 불심으로 씻으려 했다. 형상에 머물려는 마음을 다잡고, 마음의 대상에 머무르려는 마음을 버리면서 마음의 수양을 흐르는 세월과 함께 했다.
이 모든 것에 오직 한 사람 연이가 있어 행복했다. 이 또한 마음이 대상에 머무는 것이긴 하나, 자암은 연이를 아끼는 마음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이렇게 또 세월은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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