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어쩌다 부모가 되었을까. 부모이기 이전엔 분명 어린이였던 우리인데 어느 시점부터 느닷없이 부모로서의 삶이 숙제처럼 밀려온다. 준비한다고 준비해본들 실전에서는 통하지 않는 일들의 연속인 삶. 그래서 만나보았다. 엄마 혹은 아빠의 이름으로 오늘도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양말을 뒤집어 신고 나왔는지 모를 일로 그저 횡설수설하는 어설픈 어른사람을. 첫 번째 손님은 멋진 싱글파파, 박기석 씨. 아홉 살 인생의 아들과 친구 삼아 신나게 지내는 그를 만나 이야기 나눠보았다. 그의 대답을 거의 그대로 살려 실어둔다. <편집자 주> 

◆ 어떻게 아빠가 되었나: 
서른에 아빠가 된 기석 씨, 유림동 이웃사랑으로 커 온 아들
2010년 6월 9일, 아빠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 전부터 아기를 워낙 좋아했었는데 누나 아이 3명을 조카로 봐오면서 아기가 얼마나 예쁘고 소중한지 익히 알고 있었다. 특히 누나에게 딸이 있었는데 너무 예뻐서 머리도 매일 땋아주고 그랬다. 내 아이는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서로의 생각이 달라 낳자마자 얼마 되지 않아 결론적으로 아이는 아빠인 나 혼자 키우게 되었지만 결코 혼자 키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집은 고현면이었으나 거의 5-6세까지 읍 유림동에서 일하며 아이 키우며 살았기에 유림동 어르신들께서 아이를 많이 돌봐주셨다. 특히 지금은 돌아가셨으나 전문오토바이집 사모님께서 밥도 많이 주시고, 항상 예뻐 해주셨다. 그 바로 옆집 사천집 닭죽도 참 많이도 먹고 컸고, 중앙탕 목욕탕을 가면 늘 초코우유 사주시던 할아버님들, 여러 이웃분들 덕분에 밝은 아이로 커 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항상 감사하고, 남해토박이가 제 고향에서 아이 키울 때의 특혜 아닌 특혜가 아닐까 싶다.

◆ 가장 힘들 땐 역시 아이 아픈 일: 돌 언저리 때 맞닥뜨린 신종플루와 6살에 겪은 대학병원
아이를 앞으로 아기띠를 하고서 운전해서 병원을 오가던 시절. 돌 언저리때 한창 신종플루가 유행하던 당시 아들이 신종플루, 독감에 걸렸는데 타미플루 처방을 못 받아서 전전긍긍했을 때 애를 태웠다. 2011년도 그 언저리였던 것 같은데 삼천포 제일병원에서 타미플루 먹여야 하고, 격리 조치 시켜야 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해줄 병원과 병실을 못 찾아 전전긍긍했다. 당시 남해엔 중앙병원 소아과 밖에 없었는데 그 당시의 중앙병원 원장님이 타미플루도 구해주고 격리입원도 시켜주셔서 다행히 치료받을 수 있었다. 선천적으로 기관지가 약한 아들이었기에 크는 동안 호흡기치료는 가끔 받긴 했으나 큰 사고 없이 무탈했다. 그러다 6살 때 지금 생각하면 ‘급체’였는데 애가 계속 저체온으로 맥없이 힘들어하는데 경상대학병원에서 무시무시한 동의서 까지 다 쓰고 피검사를 해도 원인을 못 찾고 계속 검사만 해서 힘들었다. 그러다 우연히 진주의 한 한의원에서 지은 약을 두 번 먹고 나니 싹 나아서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아찔하기도 하다.

◆ 초보 유튜브: 아들 때문에 발 들인 유튜브, 아빠와 아들의 성장일기
‘아빠는 싱글’이라는 제목의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당초 제목은 ‘아빠와 아들의 싱글벙글 이야기’였는데 유튜브를 하나도 모르고 개정을 만들려다보니 이름짓기부터 난항을 겪었다. 구글이 영문버전이니 성, 이름 이런 식으로 별개로 되면서 칸이 바뀌어 ‘싱글벙글 아빠’ 뭐 이런 식으로 계속 원하는대로 안되기에 갑갑한 마음에 수십 번 수정하다가 ‘아빠는 싱글’로 겨우 정리가 되었다. 아들이 유튜브 하고 싶다고 해서 일도 모르고 2019.07.28.일에 가입하고 시작했는데 이제는 내가 더 재밌어서 밤새는 줄 모르고 하며, 다른 이들에게도 ‘유튜브 전도사’가 되어 살고 있다. 한달동안 영상 30개를 올릴 정도로 유튜브 하는 재미에 폭 빠져 산다. ‘남해 전어 레시피’, ‘나비생태공원 방문기’ 등 주로 남해의 먹을거리와 아이와 갈 곳 위주의 영상이지만 사진과 또 다른 생생한 체험일기로 추억을 공유할 수 있고 소통 할 수 있어 매력적인 것 같다.

◆ 개인적으론 아이 키우기 좋은 남해라고 생각합니다만
집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이순신순국공원도 있고 남해읍에만 가도 유배문학관이 있는 남해군이다. 개인적으로 사교육보다는 많이 뛰어놀 수 있게 하면서 많은 걸 체험할 수 있도록 키우고 싶다는 생각 때문인지 이렇게 자연속에서 놀 곳이 많은 남해군이 아이 키우기 좋은 곳이라 생각한다. 딸랑 아들 하나지만 정말 독립적인 한 인간으로 키우자는 결심을 하고 있다. 그리고 크고 작은 대외행사에 아들과 함께 동행하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하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예뻐해주는 분을 만나고, 덩달아 감사 인사할 줄도 아는 아이가 되었다. 그게 항상 고맙다. 
전교생 36명인 작은 초등학교에 다니다 보니 진짜 가족 같은 분위기다. 혼자 크는 게 아니라 여러 학년이 자연스레 어울리다 보니 자연스레 형-동생 관계를 알게 되고 돕고 도울 줄 알게 되는 게 좋다.
 
◆ 부모가 되어보니: 서류 위주의 정책이 아니라 ‘실질적인 아동 복지’ 를 원한다
서류만 보고 행하는 정책에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사실 나 역시도 부모가 되기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많다. 아이 손톱 밑에 때가 끼고, 법적 부모가 버젓이 계셔도 할아버지, 할머니와 살기에 제대로 씻지 못해 머릿니가 있는 아이도 있다. 그런데 노부, 노모가 2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아이를 어떻게 제대로 씻기겠나. 아이들 수 세서 빵과 과자 사주는 것도 물론 좋겠지만 그 간식들로 썩은 충치를 검진받으러 데려갈 어른이 없는 아이도 종종 있다. 집은 잡동사니로 가득 차 있고 신발 뒤축은 닳아있지만 챙겨서 직접 신발을 사줄 수도, 며칠째 같은 옷을 입고 다닐 수밖에 없는, 서류로는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 놓인 아이가 분명 존재한다. 그 아이들은 이장님께 물으면 안 된다. 담임선생님께 물어봐야 한다. 다문화가정은 외려 지원이 풍족한 경우가 많다. 부모가 멀쩡히 있는 아이인데 실제 어른의 돌봄을 못 받는 아이들이 문제이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사는 아이, 편부ㆍ편모 가정에 놓여 제대로 돌봄을 못 받는 가정을 직접 방문해 정기적인 청소와 목욕, 의복 정비 등 이런 실질적인 복지가 필요한데, 제가 너무 꿈이 큰 걸까요? 솔직히 말하고도 마음이 편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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