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문화원에서 3년째 서예를 지도하고 있는 신갑남 선생님은 서예를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나이가 더 들기 전에 한 점 한 획이라도 더 전수해주고 싶어 늘 배움의 발걸음을 기다리고 있다. 초등3학년시절 6・25를 겪은 선생님은 11살 때, 남동생이 배우던 한자를 어깨너머로 습득하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것이 서예를 하는 자신에게 큰 자산이 된 것 같다고 회고했다. 대학교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잠깐 교직에 몸담은 후, 1964년 결혼과 동시에 가정주부의 본분을 다하며 가족을 위한 삶을 살던 그녀는, 늦은 나이라 할 수 있는 62세가 되어서야 서예를 갈망하며 스승을 찾아 먼 곳까지 배움의 노를 저어갔다. 오체를 모두 섭렵해 창의적인 필력을 구사하던 선생님은 전국서예대전에서 실력을 검증받고 싶어, 2005년부터 2014년까지 수많은 작품을 출품 수상의 열매를 거뒀으며, 100군데나 넘는 책에 작품이 실리는 업적도 남겼다. 한 번도 받기 힘든 초대작가 인증을 4곳에서나 받았고 지금까지 2회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앞으로도 간직하고 있는 작품들을 군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붓을 잡을 때마다 여전히 새롭게 돋아나는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소녀처럼 미소를 짓는 선생님은 전국서예대전에서 실력 있는 1000명의 서예가들이 출품한 작품 중 최종40점에 선정된 ‘봄날’작품에 가장 큰 자부심을 느낀다며 포장돼 있던 그것을 옆에 두고 사진을 찍었다.           <편집자 주>

서예를 갈망하며 찾은 스승들, 모두 감사해
가정살림을 책임지게 될 무렵 문방구를 운영한 후 가구점을 운영하면서 어느 날부터 서예를 배우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솟구쳤다. 누군가가 서예를 하고 있다는 말만 들으면 보고 싶어 가만있지 못했다. 그녀의 가게와 인접한 병원에서 어느 원장선생이 붓글씨를 쓴다는 사실을 알고는 여유시간이 생길 때마다 찾아가 보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친구의 소개로 남해도서관에서 본체(예시글)를 보고 직접 글자를 써 보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고, 남해문화원에서 붓글씨를 지도한다는 선생에게서 길영(永)자를 하나 받아와 계속 연습하는 시간도 가졌다. 서예를 향한 마음을 잠재울 수 없어, 결국 소천 신제국 선생과 도원 박성아 선생에게서도 배웠고, 부산에서 남해로 오신 남천 양병량 선생과 전라도 광영에 사시는 토의 전종구 선생에게서도 새로운 영역의 서예를 접하며 절차탁마를 거듭했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듯 3년 만에 응모한 첫 작품 큰상 받아
“양병량 선생에게서 서예를 배우고 있던 시기에, 한 번은 선생님이 서예를 배우는 사람들끼리 회원전을 할 테니 오늘 집에 돌아가면 쓸 수 있는 분량만큼의 붓글씨를 써오라”고 했다. 그녀는 흐릿한 불빛 아래에서 밤새도록 세로2미터 가로70㎝크기의 화선지에 같은 내용의 글씨를 20장 써서 다음날 선생에게 보여드리게 되었는데 모두 놀라고 말았다. 양 선생은 그 중에서 한 장을 뽑아갔고 남은 19장은 다시 집으로 되가져왔다. 잠깐 휴식을 취하면서 서예잡지를 훑던 중, 전국서예대전을 한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다. 날짜도 며칠 남지 않고 하여 19장 중에 선별한 한 작품과 그동안 써놓았던 몇 작품을 들고 부산에 있는 한국서화협회로 가서 직접 접수를 했다. 

2005년 처음으로 응모했던 그 작품이 며칠 후 덜커덕 큰상의 영광으로 돌아와 귀한 벼루까지 상품으로 받았다. 이 상으로 탄력이 붙은 그녀는 2014년까지 여러 곳에 작품을 출품하여 그때마다 입선의 기쁨을 맛보았다. 상은 다 기록을 하기 힘들 정도로 많지만 제일 자부심을 가지는 작품은 ‘2012년 한국서예협회 봄여름가을겨울Ⅱ’에 전국의 내로라하는 작가들의 1000작품 중 600작품 속에 뽑혀 실린 것과 이후 2013년 다시 600작품에서 40점을 뽑는 과정에서도 당당히 선정되어 ‘2013년 한국서예’에 다시 실리게 된 일이었다. 이 책은 명망이 있어 국외로 출판되어 나갔기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었다. 
2015년부터는 출품을 자제하고 더욱 내적 정진을 해 나가는 그녀의 작업실에는 돌돌말린 작품, 펼쳐져 있는 작품, 액자 속에서 예사롭지 않는 기운을 내뿜는 작품들로 가득하여, 제자들에게 회자되던 “신갑남 선생님의 붓놀림은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다”는 말이 실감이 나고도 남았다.

전국대전에서 받은 상들과 100여권에 소개된 작품들(개인전‧단체전)
초대작가는 같은 명칭의 서예대전에서 12점에서 13점을 취득해야만 주어지는 자격이다. 입선시마다1점으로 쳤을 때 13번 정도의 수상실적을 거둬야만 받을 수 있는 것인데 신갑남 선생은 그런 인증을 네 군데에서나 받았다. 2011년 농업인서예대전 초대작가 인증, 2013년 남도서예・문인화대전 초대작가 인증, 이외에도 두 군데가 더 있다. 그리고 작품을 출품한 곳을 들여다보면 전북비엔날레 2007세계대회・2008년 남도서예문인화대회・2010년 특선2회 삼체상 외 다수, 서울 경희궁 전시・2011년 대한민국서예대전・2012년 제31회 미술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부문 입선, 서울예술의전당 전시・2013년 농업인서예대전 우수상 외 다수, 2014년 현대서예 입선, 서울예술의전당 입선2회를 하고 전시를 했다. 

그녀의 작품이 실린 책은 현재100곳이 넘을 정도인데 그중 ‘제20회 농업인서예대전’에 실렸던 ‘농가락’의 문자화는 신비스런 형상으로 어떤 힘을 주는 것 같았다.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썼다는 이 세 글자는 노동의 힘겨움을 잊고 덩실덩실 춤을 추게 하는 무언의 몸짓으로 충분했다.  
훌륭한 작품들이 ‘서현서실’에서만 머무는 게 안타까웠던 지인들이 전시회를 권유하여 2009년에는 남해복지관2층에 일주일간 전시, 2015년 남해국민체육센터2층MK홀에서 1주일간 남해유배문학작품을 전시했고, 단체전은 2012년 봄여름가을겨울전Ⅱ・사단법인 한국서예선별전・서울 인사동 한국미술관 전시・2013년 24호 사단법인 한국서예 선별지상전・서예잡지 영호남교류전 총6회・하동문화예술회관 전시・순천문화예술회관 전시・창원교육청갤러리 등에서 했다. 

세 번째 개인전은 남해유배문학작품으로 유배문학관에서 전시 희망
고 정의연 선생이 신갑남 선생의 필체를 보고 극찬을 하며 남해유배문학관에 주춧돌을 놓으려고 할 때쯤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규장각에 잠자고 있는 남해유배문학작품을 서예로 재탄생시켜 남해유배문학관이 준공될 때 전시회도 함께 하자는 청이었다. 

신갑남 선생은 그 선생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완공이 되기 전인 3년 동안 주야로 그 숙제를 끝마쳤다. 남해문견록・엄정일천리・등금산・충무사당・음성굴・매무・용문산상동근・구운몽・창망삼도・금조욕사・영유시20수 등이었는데, 유배문학관이 준공됐을 때 전시할 공간의 미비와 또 다른 이유로 인해 처음 한 약속처럼 전시는 할 수 없었다. 그때 전시를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던 그녀는 몇 년 후 유배문학관을 찾아가 전시의 기회를 한 번 더 봤지만 이룰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남해유배문학작품으로 준비된 서예작품을 꼭 전시를 하고 싶어 했다. 고 정의연 선생이 “우리지역 사람들에게 이런 게 있다고 세상에 꼭 빛을 보이자고 한 것”을 기억하고 있고 또 자신도 큰 의미를 두고 있기에 세 번째 개인전이 꼭 실행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서예를 품고 사는 신갑남 선생에게 서예를 정확하고 바르게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은 m.010-8872-3424로 연락하면 된다. 수강은 고풍스런 자택에 마련된 서현화실 또는 남해문화원 등에서도 배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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