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숙(남해문화원 사무국장·소설가)
김미숙(남해문화원 사무국장·소설가)

연이는 한양 연희방 최현대감의 무남독녀로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구김살 없이 자랐다. 자암의 영특함은 입소문을 타고 연희방 인근에 있는 사대부들에겐 화젯거리였다. 연이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중얼거렸다.
“대유같은 든든한 아들이 있었으면…”
연이는 어머니의 푸념을 들을 때마다 은근히 샘통이 났던 어린 날의 기억이 있었다. 연이어머니는 평소와 달리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유난스레 분주했다. 연이는 영문을 몰라 유모에게 묻자 김계문대감과 그 자제분이 온다고 연이어머니가 한껏 들떠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연이 어머니는 대유가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하면서 마치 장원급제한 아들을 반기듯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 모습을 바라보는 어린 연이는 마음이 서운했다.
“연이야, 귀여운 우리 딸이 아들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고”
연이는 이런 어머니의 푸념을 들을 때마다 섭섭했다.  연이는 매화나무 아래에서 조약돌과 조개껍질을 모아놓고 어머니 몰래 장독 뚜껑을 가져왔다. 그 장독은 어머니가 밤마다 정안수를 떠 놓고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비는 신성한 장독이었다. 그런 장독 뚜껑을 열어 연이는 나름의 의식을 취하고 홍매와 백매의 꽃잎을 잔뜩 따서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아버지를 따라나선 대유는 조그마한 꼬맹이가 뒤뜰에서 꼼지락거리며 앉아 있는 모습이 귀여워 살며시 다가갔다. 젖살이 통통하게 오른 귀여운 여자아이가 앙증맞은 작은 손으로 매화 꽃잎을 하나하나 실에 엮어 목걸이를 만들고 있었다. 대유는 신기하고 깜찍해 한참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쪼그마한 여자아이가 마치 대유가 뒤에 있는 것을 아는 것처럼 뒤를 돌아보며 꽃목걸이를 대유의 손에 불쑥 내밀었다.
“치, 도련님은 좋으시겠어요. 아들이라서…우리 어머니가 도련님 같은 아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거든요. 매일 새벽마다 아들 낳게 해달라고 빌거든요. 도련님이 우리 어머니 아들하세요. 그래야 어머니가 추위에 떠시며 기도를 하지 않으실 거잖아요. 도련님이 우리 어머니 아들해 주면 선물로 제가 이거 드릴게요. 그리고 제 오라버니 하세요. 아시겠어요”
대유는 심통이 가득한 얼굴로 이야기하는 여자아이가 귀여웠다. 그리고는 부끄러운지 그냥 달려가는 조그맣고 야무진 표정을 가진 여자아이가 최현대감의 여식임을 그는 알 수 있었다. 연이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한 번씩 김계문 대감의 아들말만 나오면 칭찬이 샘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사랑을 빼앗기는 것 같아 속상했다. 연이는 심통이 났지만 영특하고 든든한 오라버니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연이는 매화꽃 목걸이로 어머니가 좋아하는 대유 도련님의 마음을 사려고 했었다. 연이가 생각해 낸 일종의 앙증맞은 거래였던 것이다. 연이는 어릴 적 엉뚱했던 자신을 생각하니 쓴웃음이 나왔다. 그때 그 여자아이가 지금 그의 앞에 앉아있는 여인이라는 사실을 자암은 전혀 알지 못했다. 
연이 역시 대유가 높은 벼슬을 하고 나라에 큰 일을 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 해 겨울 연이 아버지가 반역죄로 변고를 당하고 유배를 떠났기 때문에 대유의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었다. 17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한양에서 천리 길 떨어진 유배지 남해에서 죄인과 기생이 되어 두 사람이 만나게 될 줄 연이는 꿈에도 생각치 못했다. 
지금 연이의 눈 앞에는 연희방 대갓집 마님들의 총애를 받던 총명하고 잘 생긴 17세 대유 가 아닌 세상과 등지고 실패한 개혁자가 되어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외로운 술잔을 삼키고 있는 유배객이 그녀의 술잔을 받으며 앉아 있었다.  유난히 뽀얗고 어여뻤던 6살 연희방 아씨 연이는 섬기방의 기녀가 되어 고향에서 온 손님과 아픈 반가움을 숨기며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노량기방을 다녀간 후 희철과 자암은 서로 다른 마음의 고민이 생겼다. 희철은 평소와 다른 강금이의 모습에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으며, 자암에게 이런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괜한 농과 너스레로 자신의 어색함을 무마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희철의 마음은 자암을 바라보는 강금이의 눈빛과 몸짓에 모든 신경을 곧추세우며, 천상과 지옥을 오가면서 고뇌에 빠진 밤을 보내야만 했다. 희철은 이런 마음을 강금이와 자암에게 들키지 않으려 긴 밤을 다스리며 하루 하루를 견뎌나갔다.  
자암은 한양에서 자란 귀한 여식이 칼바람을 맞고 천리길 남해섬에서 해어화가 되어 있는 강금이를 보며 깊은 연민을 느꼈다. 아녀자로 태어나 한 남자를 사랑하고 일부종사(一夫從事) 하지 못하는 관기가 되어버린 강금이나, 사나이로 태어나 세상에 뜻을 펴지 못하는 유배객인 자신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객지에 나가면 고향 까마귀만 봐도 반가운 것을 한양 어느 하늘아래 함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자암의 마음은 강금이에게 향하고 있었다.  
밀밭만 지나도 술이 취하는 희철은 그런 두 사람의 맘이 야속했지만 상처를 가진 그들이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것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 날 이후 자연스럽게 자암과 희철은 지역향사들과 노량포구에 있는 기방을 자주 찾았으며, 시문을 함께 나누며 유배지의 외로움을 달랬다. 남해의 향사들은 자암의 학문의 깊이를 알기에 노량에 죽림서원을 짓고 학문에 목말라하는 후학을 양성하며 유배지에서의 세월은 그렇게 몇 년이 흘러갔다.    
죽림서원의 대나무 사이로 찬바람 소리가 약해지고 서원에 있는 홍매와 백매가 유난히 활짝 핀 어느 날, 자암은 강금이의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자암이 남해로 유배 온 지 다섯 해가 되는 날이다. 기약 없이 하루 하루를 버텨가는 삶이 아프고, 사나이로 뜻을 펼치지 못한 응어리가 자암의 두 볼에 굵은 눈물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자암도 연이도 구슬피 들려오는 거문고 소리에 자신의 감정을 의지하는 듯했다. 
잠깐의 고요함이 흐르고  자암의 두 뺨에 부드러운 여인의 손길과 따스한 입김이 느껴졌다.  자암의 눈물에 살포시 입을 맞추는 연이의 입술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자암은 눈을 감은 채 연이의 숨결과 미세하게 떨리는 부드러운 입술의 전율을 몸 속 깊은 곳까지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자암은 이 순간을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그는 유배지에서 지친 영혼을 눕히고 그녀의 품에서 잠들고 싶었다. 그녀는 꿈 속에서 수 없이 품었던 여인이다. 하지만 이 여인을 자암은 품을 수 없었다. 최현 대감의 여식인 연희방 꼬맹이가 남해섬에서 아픈 세월을 보내고 있는데, 그녀의 아픔을 달래주지도 못하면서 남자의 욕정을 풀기 위해 그녀를 품는다는 것은 대감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처자식이 있고, 언제 떠날지 모르는 자신 때문에 연이를 상처받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최현대감의 여식이 아닌 자암이 사랑하는 여인으로 마주보고 싶었다. 이 불쌍하고 가여운 여인은 자신의 아픔보다 말라 죽을 것만 같은 자암의 영혼에 단비가 되어 몸과 마음을 서서히 적시고 있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자신의 품 속에 날아 든 가여운 한 마리의 새는 그렇게 자암의 품에 살포시 안겼다.  
찬바람이 시린 봄날, 자암과 연이는 서로의 체온과 마음으로 타향에서의 외로움을 사랑으로 채웠다. 연이는 자암에게 자신이 연희방 꼬맹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자암이 지고 가는 아픔의 무게에 자신의 아픔까지 더해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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