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철명상디자인학교 교장
박 철명상디자인학교 교장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만약 누군가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면 우리는 어떤 답을 내릴 수 있을까요. 표현으로 보면 너머는 시간이나 공간적인 측면 혹은 예측 불가능한 마음의 힘이나 잠재된 능력을 추상하기도 합니다. 
또한 너머는 나 이외의 어떤 곳, 보이는 현상을 넘어 미지의 어떤 세계를 염두에 두기도 합니다. 이를 더욱 자세히 살펴보면 너머는 기연(其然) 즉 보이는 현상만이 아니라 불연(不然) 즉 드러나지 않는 질서 속에 더욱 위대함이 있음을 직관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기연과 불연의 사이에서 너머의 객관성을 유지할 때 이 너머가 주는 교훈이야말로 대상을 조화롭게 이끌 지침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그 너머에 있는 한 가지를 만날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픔이 있을 때 비난을 받았을 때 질책이나 꾸중을 들었을 때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가요? 그 너머에 무엇이 있었다고 이해하며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편안히 가져가는 것도 효율적인 삶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경쟁에 치우쳐 지금의 생각과 감정의 상태로서는 사실 그 너머에 대한 인식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왜냐하면 그 너머에 도달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거나 그 너머의 세계를 맞이할 혜안이 제대로 열려 있지 않은 경우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너머에 있을 무언의 존재(희망, 긍정, 생명, 통찰, 존재, 기대, 의미, 해답)는 실체가 없음에도 일체 생명의 순수성을 갸름하여질 근거가 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여기 출세 정도를 갸름할 비근한 예를 하나 들어봅니다. 우리는 거의 성공자의 기준을 돈 많이 벌고 입신출세한 사람이나 권력에 오를 사람으로 결론 짓기도 합니다. 

인격이나 그 사람의 품성을 기준으로 삼는 경우는 드문 편입니다. 
이른바 외형의 드러난 흔적으로 평가하는 시류에서 보면 당연한 현상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비록 남루한 옷차림의 거지라 할지라도 그 너머에 따뜻한 품성과 온유한 감성이 스며 있다면 그 역시 성공자의 반열에 들어섰다고 평가해보면 어떻겠습니까? 만약 여기에 이의를 둔다면 “행색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 그가 가진 것이 없고 남루하더라도 그의 성품으로 보면 세상을 포용하고도 남을 여유로움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성공의 기준이 아니겠는가?”라고 답할 것입니다. 
많이 가진 것에 삶의 척도를 둘 것이 아니라 다소 어려운 입장이라도 마음이 따뜻하다면 그 존재감이 남다르다는 것을 의미 있게 바라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많이 가지거나 안다는 것이 생(生)의 능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그 너머에 있을 진심은 세속으로 바라볼 관념의 대상이라기보다 기대와 희망의 세계로서 입자와 입자 간에 형성될 조화와 균형의 자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대감 속에서 그 너머의 세계는 크고 작은 파동과 입자의 오묘한 율동이 지성으로 연결되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화사한 꽃이 하나 열릴 때마다 너머에서 펼쳐지는 생명의 경이로움을 숙지할 때면 고개가 절로 숙어지고, 한밤중 들녘에서 들려오는 미생물의 아름다운 음률에 마음속에 머물던 사념(思念)도 머지않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또한 처음 만난 사람이라도 선의의 감정으로 먼저 인사하고 다가간다면 마음에 다가올 훈훈함은 상상외로 크게 드리워질 것입니다. 
이렇듯 너머를 관조하면 할수록 평소에 우리가 자주 접하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존재의 의미를 공유할 수 있는 여유로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미움도 그 너머에는 사랑이 있고 분노도 그 너머에는 화해의 손짓이 기다리고 있듯이 말입니다. 마음이 열리고 눈(시야)과 귀(소리)가 그 너머에까지 다다르기만 한다면 어느 것이든 해결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너머에 있을 진심을 바라보고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문제에 대한 답을 얻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너머는 미지의 의지로써 세상을 밝힐 주체로 보이지 않게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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