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누군가 기회를 잡았을 것이다. 또 다른 한때엔 세상을 지배했는지도 모른다. 선사시대는 물론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세종19년까지 남해군의 소재지였다는 고현면. 그곳의 중심지인 탑동 혹은 중앙동을 걷노라면 열쇠를 놓친 눈먼 사대부가 떠오르는 듯하다.
정지된 화면 같은 이곳을 걷다 보면 누군가가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 말을 걸어올 것만 같다. 나조차 잃어버린 길을 물어올 것 같은 그곳. 
고현면 중앙동. 고현공설시장은 이제 시장의 기능은 내려 놓았다. 정지 장군의 옛 명성만큼은 기억하잔 듯 정지 석탑이 먼저 반기는 그곳. 
한 노파만이 과일 몇 알과 야채 일부를 놓아두고 장사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사뭇 주막 같아 보였던 보리밥집도 세월을 말해 주는 나무간판만이 어렴풋이 존재를 알리고 뒤켠 중화요리집만이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곳은 곧 대장경판각지이자 호국성지의 상징인 고현면으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일부만 남겨둔 채 문화광장으로 바뀔 예정이다. 창고처럼 보이는 낡은 건물 역시 한때 사진관이었다는 2층 건물도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라고 길에서 만난 대사마을 정준성 어르신께서 설명해주셨다. 경로회관은 그대로 둔다고 하나 그 외관엔 변화가 조금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공설시장을 나가 고현면사무소 방향으로 쭈욱 내려가면 반세기, 즉 50년 가까이를 지켜온 신광이용원과 재화미용실이 우리를 반겨준다. 
오래된 흑백영화처럼 긴 여운을 주는 공간의 힘. 그렇게 우리가 사랑한 거리를 다시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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