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숙(남해문화원 사무국장·소설가)
김미숙(남해문화원 사무국장·소설가)

정희철은 자암의 호방하고 강건한 필체를 좋아했다. 자암의 붓 끝은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얀 종이 위의 붓은 호방함과 자유로움을 조절하며 춤을 추고 있었다. 접신하는 무희의 경이로운 손끝과 발끝처럼 우아한 자암의 붓놀림은 예인의 경지를 뛰어넘었으며, 용이 승천하는 듯한 강건한 필체는 자암과 하나가 되어 다시 태어나는 것 같았다. 무아지경에 빠져있는 자암의 모습을 숨 죽여 지켜보던 정희철과 여러 벗들은 그 엄청난 기운에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했다. 
조선시대 명필 중 하나인 자암의 인수체를 두 눈으로 보는 호사와 함께 명나라 사신들이 그의 글을 구하기 위해 혈안이 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암은 눈을 지그시 감고 붓을 내려놓았다. 그는 먹물이 마르기 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세기의 걸작을 구겨버렸다. 그는 구겨진 종이를 부드럽게 뭉쳐 연인의 몸을 정갈히 닦듯  벼루를 정성들여 닦아냈다. 자암의 행동을 기이하게 여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당대 최고의 명필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자암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장난스럽게 정희철에게 말을 건넸다.
“형님, 글 쓰는 것도 이제 지겹고 하니 남승도 놀이나 합시다.”
“아니 자암이 어찌 남승도 놀이를 아신단 말이오?”
“섬에 유배되어 팔도를 유람하지 못하니 남승도 놀이로 지난 추억을 되새겨 보아야 되지 않겠소. 형님, 팔도강산을 유람한 지도 오래되어 기억 끝에 가물거리지만 제가 판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박교수는 기생을 하고 형님은 화상(스님), 저는 한량을 할 터이니, 주사위는 기생인 박교수가 먼저 던져 보시오. 누가 한양에 먼저 도착하는지 따져 봅시다.”
자암은 바지에 걸려있는 도포자락을 뒤로 제치고 신명이 난 아이처럼 판을 만들고 있었다. 남해 특유의 남승도 놀이를 자암이 아는 것이 놀랍고 신기했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 듯했다. 자암은 주사위를 던질 때마다 나오는 명승지를 보면서 맛깔 나는 입담으로 좌중을 즐겁게 했다. 당연히 자암이 팔도를 제일 먼저 돌아 한양에 도착하였다. 자암이 기생을 맡아 명승지를 소개하면 정희철과 그의 벗들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거침없이 나오는 명승지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묘사는 또 한 번 주위를 놀라게 했다. 정희철은 세상을 앞서는 자암의 뛰어남이 안타까웠다. 자암의 화려한 입담 뒤에는 쓸쓸함이 묻어 있었다.
자암은 어렸을 때부터 거문고 소리를 좋아했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정악원에 있으면서 악공들과 허물없이 지내며 예인들을 각별히 아꼈었다. 자암은 정악보다는 인간의 감성을 느낄 수 있는 향악을 즐겨 들었다. 자암은 술자리에 예인들을 불러 자유로이 연주하게 하고 서로의 예술적 기운을 나누는 것을 즐겨했었다.
그런 자암이 외로운 섬 남해에서 해죽으로 만든 술대 끝으로 거문고를 아프게 내리치고 있었다. 거문고 소리는 모진 바닷바람에 둥지를 잃고 헤매는 외로운 학처럼 구슬프게 허공을 날고 있었다. 정희철이 있어 자암은 고마웠다.
인연
정희철은 밀밭만 지나도 술이 취하지만 마음의 여유를 풍류로 즐길 줄 아는 진정한 풍류랑으로 예인을 아꼈다. 강금이는 노량기방 최고의 미색과 음색을 가진 예기다. 글깨나 한다는 한량들도 강금이의 거침없는 글솜씨와 말솜씨에 당할 재간이 없을 정도로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다. 강금이는 비록 기녀지만 어디에서든 기품을 잃지 않는 당당함이 한량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거문고, 아쟁의 구슬픈 가락과 함께 몸과 영혼이 함께 호흡하는 강금이의 춤사위는 예인으로서 존경을 받을만했으며, 깊이를 알 수 없는 그녀의 표정은 보는 이로 하여금 함께 호흡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가져올 정도였다.  희철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남해섬 작은 기방에서 먼 하늘만 바라보는 강금이가 안타까웠으며, 그녀의 시름이 자암으로 인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길 진심으로 바랬다.      
“높고 신비로운 산은 큰 바위가 있고 맑고 깊은 물이 있는 골짜기가 있소이다. 자암의 필력은 신이 시샘을 할 정도로 높은 경지에 있고,  노량 기방의 강금이는 삼남지방 최고의 예기로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 있으니, 자암과 강금이가 높은 산과 깊은 골이 되어 타지에서의 외로움을 남해에서 달랬으면하오. 나 역시 강금이의 벗이 되고자하나 내가 가지고 있는 비루한 밑천으로 함께 하기는 어렵고 두 사람의 조화로운 만남에 흥이나 나누고자하오이다.“
 희철의 말 속에는 강금이라는 기생을 예인으로서의 아끼는 마음이 숨어있었으며, 어디에도 마음을 열어놓지 않는 강금이가 자암에게만은 빗장을 풀 수 있을지 내심 궁금한 마음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농이 지나치십니다. 나는 큰 바위도 산도 아니며 풍류를 즐길 수 없는 죄인이올시다. 기녀라니, 당치도 않소이다. 주막에서 탁주 한사발이면 족하오이다. 형님의 그릇이 기생의 그릇보다 작다 하니 어찌 그리 겸손한 말씀을 하시오.”
자암의 말을 듣고도 아무말 없이 미소를 짓고 있는 희철에게 다시 한마디 건넸다.
“형님, 깊은 골짜기의 물은 맑고 차지만, 수 많은 골짜기와 바위를 그냥 스쳐 지나갈 뿐이고, 그 골의 큰 바위는 지나가는 맑은 물소리를 듣고 서 있을 뿐이외다. 깊은 골짜기의  계곡에서 쉼 없이 흘러야만 하는 물의 외로움과 큰 산이 품어야 하는 수 많은 것들에 대한 무게감이 얼마나 고달프겠소. 그냥 조그마한 웅덩이에 물고기도 쉬어가고 차가운 물도 햇볕에 데워주고 비라도 오면 다시 넘쳐 흘러가는 그런 삶이 더 행복하지 않겠소. 형님처럼 말이오.”
희철은 자암이 자신의 얘기를 건성으로 듣는 같아 속상했지만, 그의 마음을 알 것 같아 더 이상 말을 잇지는 않았다.  
“자암, 강금이는 기생이라 하기엔 사대부 여인 같고, 사대부 여인이라 하기엔 기생 같은 참으로 묘한 여인이오. 거문고를 다루는 솜씨에 신묘함이 있고, 소리 또한 삼남에서 그녀를 능가하는 기녀가 드물 것이오.”
정희철은 자암의 핀잔에도 강금이의 기예를 자랑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암은 일부러 희철의 말을 피해가는 것 같았다.
“형님, 강금이라는 기녀의 거문고 다루는 솜씨에 신묘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마음에 신묘함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하하하”
자암은 한양에서도 예기들의 기예를 아끼며 그녀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었다.  자암은 희철이 입버릇처럼 자랑하는 강금이라는 기생의 거문고 소리가 듣고 싶어졌다. 그도 사내인 것을, 잠시 여인의 향기가 그리워지는 듯 했다. 하지만 애써 외면하며 궁금함을 헛기침으로 대신했다. 답답한 유배지에서의 외로움을 달래주기 위한 희철의 마음이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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