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숙(남해문화원 사무국장·소설가)
김미숙(남해문화원 사무국장·소설가)

자암은 소피가 마려웠다. 그는 남해읍성 대로변에서 두 팔을 벌리고 호방한 미치광이처럼 큰소리로 웃었다. 자암은 창자 끝에서부터 아려오는 알 수 없는 고통을 즐기며, 뱃속에 가득 찬 오물을 더러운 세상에 갈기기 위해 자리를 탐색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손가락질을 한다면 네 개의 손가락을 보지 못하는 아둔한 인간들을 조롱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추하다 침을 뱉으면 계집종이든 지나가던 오입쟁이든 자신의 스승으로 모시리라 생각했다. 자암의 흐릿한 시야에 시원하게 뻗어있는 소나무가 보였다. 그는 멋진 해송과 마주보며 세상을 희롱하듯 주섬주섬 아랫도리를 내렸다. 
그리고 터져 나오는 시원함에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노란 오물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피어나고 있었다.
“공자가 말씀하시길 술은 정해진 양은 없으나,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마시지는 않았다고 하셨는데, 저 젊은 양반의 체통은 땅바닥에 떨어졌나 보구나. 사람이 오가는 길에서 오물을 방사하는 것을 보니 체면은 안주로 씹어 먹었나 보구나. 향아! 양반님 아랫도리 구경 잘 하거라. 그리고 아랫도리가 튼실한지도 잘 살펴 보거라.”

자암은 한 여인의 매몰찬 말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주섬주섬 아래춤을 올렸다. 여인의 차가운 눈빛과 매섭게 쏘아 붙이는 야무진 입술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따라가던 여종은 부끄러운지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종종걸음으로 도망치듯 가고 있었다. 그 여인의 눈빛은 차갑고 매서웠다.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 자신을 원망하는 것 같았다. 모호한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말을 걸어 보기도 전에 싸늘히 지나가는 여인의 뒷모습을 자암은 아쉬운 듯 바라보았다.

그는 아쉬운 맘을 달래며 양팔을 흐느적 거리며 또 다른 주막을 찾아 헤맸다. 정처없이 떠 돌던 자암의 발걸음은 향교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성균관에서 보냈던 지난 시간들이 뇌리를 스쳤다. 정신이 번쩍 드는 듯 했다. 성균관 벗들의 통곡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자암은 귀를 막았다. 유생들의 통곡소리가 자암의 귓속을 찌르는 듯 했다. 야멸찬 여인의 독설과 알 수 없는 눈빛이 그나마 답답했던 자암의 맘을 후련하게 하는 듯했다. 그리고 서러웠다.

“이렇게 살 바에야 자결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눈물이 앞을 가린다. 술잔에 떨어지는 눈물은 비겁자의 눈물이었다. 자암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자신을 혹독하게 자학하며 술과 눈물이 범벅된 서러운 술잔으로 허기진 마음을 채우고 또 채웠다.
“술이 과한 것 같은데 제가 선생을 댁까지 모셔다 드렸으면 하오이다.”

술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점잖은 선비가 자암을 부축했다. 자암은 그를 알지 못했지만 그 선비는 자암을 잘 아는 듯 했다.
“괜찮소이다. 나는 누구의 부축을 받을 정도로 술에 취하지는 않았소. 술은 밥이고, 나의 약이요. 이대로 쓰러져 내일이면 공기를 마시듯 또 술을 마실 것이오.”

자암이 팔을 휘젓자 선비가 잡았던 겨드랑이를 놓으며 한 발짝 물러섰다. 자암은 흐릿한 눈으로 그를 보며 말을 이었다.
“선비양반, 나는 도의가 무엇인지 몰라 미친놈처럼 행동하고, 먹에 곰팡이가 핀지도 오래되었소이다. 정의를 듣고도 실행하지 못하며 줄행랑을 치는 아주 비겁한 놈이올시다. 공자가 알면 한심스러워 할 인간이지요. 선비양반이 가까이 할 인간이 못되외다. 하하하!”

묵묵히 말을 듣던 정희철은 자암이 자리에서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암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오래된 자상한 벗과 같았다. 
어느덧 새벽이 오고 있었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조그마한 주막을 감싸 안은 새벽 해무는 두 선비를 신선으로 만들었다.
정희철은 입남조(入南祖)한 교수관의 후손이다. 남해 향사의 집안으로 그의 아우 당곡 정희보는 정주학을 깊이 연구하고 이를 개척한 삼남의 선각자였다. 그는 동생의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지만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군자의 길을 가길 원했다. 조정에서 벼슬에 오르기를 누차 종용하였으나 정희보와 그의 형인 정희철은 벼슬을 거절하고 후학을 가르쳤다. 동생 정희보는 함양에서 옥계, 소세양, 이후백 등 많은 현자들을 제자로 두었다. 형인 정희철도 남해의 향사들과 성리학을 공부하며 군자의 길을 가고 있었다.

그는 정암의 죽음이 원통했다. 성리학을 바탕으로 조선을 개혁하고 싶었으며, 백성을 위하는 군주가 이 나라 조선을 바로 세우길 누구보다 원했다. 비록 기묘사화라는 칼바람과 함께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지만,  신진사류의 중추인 자암이 남해로 유배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자암과 벗이 되고자 정희철은 노량 주막을 찾았던 것이다. 오늘이 그들의 첫 만남이었다.

술에 취해 있었지만 세상과 맞서려는 강렬한 눈빛과 호방한 성격은 그의 눈에도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하지만 조선의 이상정치를 꿈꾸었던 젊은 정치가가 서서히 폐인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정희철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벼랑 끝에 매달려 스스로를 끝없이 옭아매며 자학하는 자암에게 희철은 좋은 벗이 되고 싶었다.
“자암 선생, 나는 비록 술을 마시지 못하지만 당신의 벗이 되고 싶소. 그리고 혼자서 마시는 술은 독이 되니 당신의 술벗이 되고 싶소이다. 나는 섬에 살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잘 모르니 넓은 식견을 가지고 있는 선생께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면 고맙겠소이다.”

자암은 그를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정희철은 재촉하듯이 다시 자암에게 말했다.
“명봉재수(鳴鳳在樹)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나무 위에서 봉황이 우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 버림받고 천리길 남해섬에 유배와서 개망나니처럼 술로 망가져가는 자신을 벗으로 삼고 싶다니, 자암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정희철의 눈빛은 진지했다. 그는 아무런 이유 없이 자암의 벗이 되고 싶었다. 
자암의 절망을 함께 나누고 타향에서의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벗이 되고 싶었다. 그날 이후 희철은 자암의 그림자처럼 함께 했다. 그런 정희철이 자암은 고마웠다. 
매사에 진중하고 세심한 배려를 잊지 않는 정희철은 벼랑 끝에 서 있었던 자암의 마음을 서서히 돌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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