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상봉(白 相奉)설천면향우
전번 ; 010-8868-9875
한국문인 협회, 한국pen, 강서문인 협회, 시조문학회, 민조시인 협회.
저서 ; 공자 활을 쏘다. 마음은 콩밭, 어럴럴 상사도야, 구룸산 곶고리강.
주소 ; 서울시 강서구 강서로 266 우장산 아이파크 135동 2003호

관음(觀音)이란 말은 불교용어로 산스크리트어의 아바로키테슈와라를 한자로 음역한 것으로 초기에는 광세음, 관자재, 관세음 등으로 불리었다. 그 뜻은 고통으로 허덕이는 중생들이 일심으로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즉시 그 음성을 관하고 해탈을 시켜준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관음성지는 동해의 낙산사 홍련암, 서해의 낙가산 보문사, 남해의 금산 보리암이 있고, 여수 금오산 향일암을 포함하기도 하며 지금은 성지 33곳을 지정하여 순례를 한다고 한다.
남해의 관음포는 남해군의 북쪽 고현면 차면리의 바닷가 포구로 일명 이락포로 불리는 곳이라고 지명사전에 나와 있고, 고현면 홈페이지에는 관음포는 고려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이름으로 호국성지로 불리는 곳으로 팔만대장경을 판각할 때 목재를 운반하기 좋은 해상통로로 적합한 곳이었다라고 설명을 하고 있다.

신라 경덕왕이 남해에 전야산군을 설치하기 이전부터 남해의 중심지는 고현면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었기에 신라가 합병을 한 후에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이름을 바꾸었지만 이는 고려 시대로 이어져 중심지는 고현면 일대였으며 선원사나 망덕사 같은 큰 절을 끼고 있어 관음포로 불리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뿐만 아니라 고려가 재조대장경판을 판각 할 때에 강화와 남해에 도감을 설치하여 경판을 판각하였기에 관음포는 잘 알려진 포구였다. 고려 말 공민왕 7년 왜구의 침탈을 견디지 못한 남해현은 하동 북천면으로 현청을 옮겨 섬을 비우게 되어 모든 것이 없어져 폐허가 되었지만 관음포의 이름은 남아있었다.  

고려 우왕 9년 정지 장군이 이곳에서 왜구와 싸움을 벌여 크게 이긴 것을 고려사의 정지열전에 기록하였는데 관음포전투라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후 시간이 지나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있을 때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물리치고 전사한 곳이 관음포 앞 바다이지만 노량대첩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관음포의 기록은 없다. 
지금은 차면 앞 해안은 이낙포로 바뀌고 순국공원이 조성되어 이순신 장군을 추모하고 나라 구한 정신을 함양하는 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되었지만 원래 이곳의 이름은 이내기였다. 이내기는 이씨가 떨어진 곳이라는 말과 유사한 이름이라 이낙포(李落浦), 이락산으로 이순신이 전사한 곳으로 개명이 되었다. 
그러나 관음포의 원래 위치는 차면 앞 바다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여지도서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관음포의 위치가 현북 21리라고 했으며 조선지지자료에는 고현면 포상리에 있다고 하였으니 실제 거리와는 차이가 있다. 

고려사열전 정지에는 섬진에 도착하여 합포의 군사들을 징집하니 적은 벌써 남해의 관음포에 이르러 우리 군세를 정찰하고 아군이 약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적은 큰 배 20척을 선봉으로 삼고 배마다 강한 군사 140명씩을 태우고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정지 장군이 왜구와 싸울 때 많은 적선이 머물러 있을 만큼 커지를 않다는 것, 가청곡의 전설이나 대사동의 위치를 볼 때 이내기와 갈구지의 어서리 사이의 폭 넓은 바다가 관음포이었으며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곳은 관음포의 안쪽이 아닌 초입인 것으로 연구결과가 확인되고 있다.

차면 앞 이내기 끝과 갈구지의 어서리 끝 사이에 있는 포구를 중심으로 많은 물산이나 사람들의 이동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주변에는 한지골(대사리), 개상(포상리), 이내기(차면리), 나라안(비란리), 안골(오곡리) 등의 마을 이름과 천명이 먹어도 남아도는 우물 천인정(千人井), 젊은이들이 무술을 연마한 구무정(九武亭), 노모를 봉양한 금호굴(金虎屈), 칠신당(七神堂), 관당(觀塘), 가칭 이고개의 전설 등이 남아있다.
이내기는 땅의 생긴 모양이 이내기 상어를 닮아 지은 이름이며 우리말의 갓이나 한자의 금차(今次)로 바뀌어 갓몬당이나 금차몬당이란 말이 남아있다. 이내, 금차, 갓은 같은 뜻을 가진 말이다.

차면(車面)이란 이름 역시 한자의 차자법을 사용한 이름으로 거낫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비녀를 닮아 비녀 채(釵)자를 사용하였다고 하지만 처음부터 기록에는 차면으로 불리었다. 
이내기 끝의 건너편은 갈구지 마을에 속하는 어서리끝이 관음포를 감싸 안고 있다. 갈구지 역시 땅의 모양이 갈구지를 닮아 지은 이름으로 가을곶이나 갈곶으로 불리었으며 뒤에 개명을 할 때 갈꽃이 되어 갈화(葛花)가 되었으나 옛 지명에는 없는 마을이며 화옹촌(火瓮村) 이라 불리는 불독 마을과 새말인 신촌(新村)이 있었으며 신촌은 지금도 남아있다.
어서리끝은 어시끝, 어새끝으로 불리는 곳으로 튀어나온 형상이 물고기의 지느러미를 닮았다거나 배나 머리모양을 닮아서 붙인 이름이라고 하며 다른 의견은 물고기를 잡는 어살이나 어사리의 끝이라는 뜻으로 아무튼 물고기와 관련이 있는 이름이다.  

관음포의 윗마을은 개뫼 개상으로 불리었으며 지금은 포상리로 남아있어 관음포가 차면의 앞바다 좁은 곳이 아니라 이내기에서 갈구지 사이의 넓은 곳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나라의 관음성지는 대부분이 사찰이지만 남해의 관음포야 말로 관음보살이 백성들의 소원을 듣고 현신 한 곳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관음포는 나라를 구한 전승지일 뿐만 아니라 호국불교로서 대장경판을 만든 불교성지였기에 관음포라고 이름 지었기 때문이다.

순국공원은 이순신 장군과 수많은 이름 없는 이들의 죽음터가 아니라 우리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도록 우리의 땅과 백성들을 지켜낸 성스러운 곳이라는 인터넷에 올린 글이 가슴에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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