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 당선작 중편소설(4) 선도화(仙島花)
신인 당선작 중편소설(4) 선도화(仙島花)
  • 남해신문
  • 승인 2019.08.16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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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숙 남해문화원 사무국장, 소설가

새로운 삶...

홍매와 백매가 나란히 백년의 세월을 자랑하듯 고귀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연이의 조부는 성종 때 정헌대부를 지냈으며 부친 최현은 판관을 지냈다. 최현은 올곧은 성품으로 매사에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분명히 하는 성품의 소유자였다.

연이는 아버지에게 중국의 앞 선 문명을 들으며 더 넓은 세상을 꿈꾸는 어린 공상가였다. 아버지의 무릎 위에서 듣는 넓은 세상 이야기는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행복한 공간이었다. 그런 연이 아버지는 반역죄로 모든 가산을 빼앗겼다. 그리고 모진 고문에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유배를 가야하는 사실을 어린 연이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임금에게 옳은 말을 한 것도 죄가 되는지 연이는 세상 사람들에게 묻고 싶었다.

연이는 아버지의 무릎 위에서 재잘거리는 모습이 더 이상 떠올려지지 않았다. 연이 어머니는 홀로 배를 타고 유유히 떠나고 있었다. 연이는 미친 듯 어머니를 불러보지만 어머니는 뒷모습만 남긴 채 조금씩 사라져갔다.

“얘야! 괜찮은 거냐?”

“정신을 차려 보거라, 혼절했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하니 쯧쯧, 이 어린 것이 살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또 한양 어느 귀한 집 여식이 칼바람 맞고 여기까지 온 거로구나. 너 같은 인생이 남해섬에 한둘이냐만 모진 풍파를 어찌 헤쳐 나갈지 걱정이구나!”

기방 행수 두향은 부모를 한꺼번에 잃고 남해섬에 홀로 남겨진 어린 연이가 가여워 거둬 키울 것을 자청했다. 관원들이 죽은 어미 품에서 떨어지지 않는 연이를 떼어 내려하자 미친 듯 발버둥치며 그 자리에서 다시 쓰러져 버렸다. 두향은 어린 연이를 노량기방까지 안고 가는 발걸음이 천리길을 가듯 길고도 멀었다.

어린 연이의 눈은 미쳐 마르지 않는 눈물이 긴 속눈썹을 촉촉이 적시고 있었다. 가늘게 들려오는 연이의 신음소리와 두향의 가슴을 파고 드는 어린 연이의 모습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모성애를 느끼며 알 수 없는 설움이 그녀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

이렇게 연이와 두향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얼마 간 세월이 지난 후 연이는 자신의 신분이 양반이 아닌 천한 관기의 신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진 명줄로 혼자 살아남은 연이는 아픈 세월을 넘길 때마다 외로움이 병이 되어 갔다.

두향은 가야금, 거문고, 춤 등 기녀가 배워야 할 모든 것을 연이에게 가르쳤다. 연이는 숙명처럼 이를 받아들였다. 영원히 떠나지 못 할 이 섬에서 관기가 되어 살아가야 한다는 것에 체념한 듯 자신의 새로운 삶에 순응하고 있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연이는 기녀라기보다는 사대부집 여인의 자태로 어여쁘게 자라났다. 두향은 학문에 능통하고 기예에도 뛰어난 연이를 친딸처럼 항상 옆에 두었고 한량들이 연이를 넘보지 못하도록 지켜주었다.

두향은 설천 노량포구 옆 큰 기방의 행수였다. 인근 하동현령, 진주목사는 한양에서 정승이 유배라도 오면 두향의 기방에서 연회를 열었다. 노량 기방은 남해현에서 제일가는 기방이었다. 남해에는 정쟁의 희생양으로 유배를 왔다가 다시 임금의 부름을 받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정치가들도 많았다.

노량 기방은 인근 목사와 현령들이 남해로 온 정치 유배객들을 접대하는 기방이었다. 항상 최상급 기녀들을 뽑았으며 그 기준도 엄격했다. 어느덧 연이는 강금이라는 기명으로 노량 기방의 최고 기생이 되어 있었다.

연이는 노량 포구의 배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죽은 아비와 어미 생각에 가슴이 아려왔다.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가혹함에 메마를 줄 알았던 눈물은 주책없이 자꾸만 흘러내렸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는 연이는 남해섬이 답답하고 싫었다.

지금쯤 한양 연희방 집마당에는 커다란 홍매나무와 백매나무가 겨울을 깨우고 서로의 자태와 향을 뽐내고 있을 것이다. 17년 전 매화나무 그늘 아래에서 아버지가 들려주던 명나라 이야기와 달콤한 매화향은 아련히 연이의 코끝에 맴도는 것 같았다.

연이 아버지는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이고, 백성의 어려움을 보살폈던 훌륭한 목민관을 꿈꾸었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하며 위민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최현은 사랑하는 딸 연이 앞에서는 꿈꾸는 몽상가였으며 철없는 아버지였다. 어머니가 아랫사람들 앞에 체통없이 행동한다고 눈살을 찌푸리기라도 하면 연이를 번쩍 들어 올려 호탕하게 웃으셨다. 하얀 도포자락이 부드럽게 연이의 뺨에 스치면 연이의 코 끝에 느껴지는 아버지의 체취가 좋았다.

그런 아버지가 누울 자리도 없이 길바닥에 팽개쳐져 버렸다. 어머니의 한 맺혀 절규하는 모습은 연이의 어린 가슴에 아린 상처가 되어 잊을만하면 누런 고름과 함께 시뻘겋게 덧났다. 서서히 굳어가는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 울며 품었던 어린 시절의 악몽은 연이를 다시금 아프게 했다.

연이는 아버지의 무덤도 찾을 수 없고, 제사도 지낼 수 없는 죄인의 여식이었다. 물색의 기운이 돋아나는 계절이 찾아오면 연이의 심장에 누군가 소금을 뿌린 것 같이 고통스럽고 아팠다. 연이는 잔인한 추억 속에서 허우적거려야만 했다.

 

새로움이 만 가지로 조화를 이룰 때

봄꽃 향기가 세상을 유혹할 때

 

맑고 아름다운 세상이 연이를 외면하고 있는 것 같아 두려웠다. 하지만 17년이라는 긴 세월을 남해 바다와 함께 하였다. 연이는 바다처럼 맑고 깊은 눈을 가졌으며, 치자 꽃향기보다 진한 매혹적인 향을 뿜어내는 남해 여인으로 자랐다. 남해의 자연을 닮아가는 것을 연이 자신만 모르고 있었다.

자암은 오늘도 주막에서 술을 마시고 하늘을 베개 삼아 누웠다. 술과 벗이 되어 흥얼거리며 시를 읊었다. 양반의 체통도 정치적 지략도 생각할 필요 없이 별을 안주 삼고 시간을 자리 삼아 흥얼거렸다.

 

술 마시자니 구름 낀 하늘도 저물고

뜬 구름 인생은 바닷가 마을에 머무네.

올해도 한식이 지나가니

꽃은 떨어지고 비만 부슬부슬 내리는구나.

 

남해에 온 지 일 년이 지났다. 자암은 하루같이 술로 세월을 보냈다. 정신이 혼미해지기는커녕 시퍼렇게 맑아왔다. 가슴에 꽉 차 있는 분노가 목구멍까지 차고 치솟아 올랐다. 참을 수 없는 분노는 몸 속에서 꿈틀거리는 독사처럼 독을 품어내고 있었다. 독기가 몸에 퍼져 온 몸이 부들거리면 떨리는 손으로 정신없이 술병을 잡아 입 속으로 술을 부어 넣어야 했다.

자암은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했다. 흔들거리는 다리를 다른 한쪽 다리로 세우며 엉거주춤하게 간신히 버티며 서 있었다. 혈관을 타고 언제 꿈틀거릴지 모르는 독사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항상 술병이 허리춤에 걸려 있었다. 자암은 비틀거리며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양반의 체통을 벗어던진 주인이 부끄러웠는지 따라다니던 머슴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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