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월영 난곡사 보존회장

고려 후기 유학자였던 이재(彛齋) 백이정(1247∼1323)을 주벽으로 치암 박충좌(朴忠佐), 익재 이제현(李薺賢), 난계(이희급(李希伋)의 위패를 모신 난곡사는 1908년 최정호, 송헌장이 건립을 발의하여 1925년 창건되었다.1997년 1월 30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37호로 지정되었으며,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난음로 219번길 7-14(난음리 910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본당인 난곡사는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내부 정면에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이 외에 근래에 세운 외삼문과 경내의 도동재 및 내삼문이 있다. 이곳에서 해마다 음력 3월 10일이면 이 고장의 유림들이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제례를 지내고 있다. 우리나라 사당 중 특이하게 난곡사 보령각(保靈閣)에는 그동안 헌관을 지냈던 분들을 영구적으로 기록하기 위해 모시고 있어 이채롭기 그지없다. 한편, 남해 유림들은 난계서원이 난음에 있었고, 백이정 선생의 업적을 고려하여 난곡사를 난곡서원으로 재정립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2018년 난곡서원 설립추진위원회를 열어 시작을 알리기도 했다.

 

 

이재 백이정(1247-1323)

본관은 남포(藍浦). 자는 약헌(若軒). 호는 이재(彝齋). 아버지는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백문절(白文節)이다. 1275년(충렬왕 1) 문과에 급제, 충선왕 때 첨의평리로 상의회의도감사를 겸했고, 뒤에 상당군에 봉해졌다. 1298년 원(元)이 사신을 보내어 세자를 왕으로 삼고, 왕을 불러가자 충선왕을 따라 연경에서 10년간 성리학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연구했고, 귀국할 때 정주(程朱)의 성리서적과 주자의 <가례(家禮)>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 뒤 후진 양성에 힘써서, 이제현·박충좌·이곡(李穀)·이인복(李仁復)·백문보(白文寶) 등 많은 문인을 배출했다. 성리학을 들여온 사람은 안향이지만,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그 체계를 파악해 크게 일가를 이룬 이는 백이정이다. 백이정의 학통은 이제현에게 전승되었다.

남포의 신안원(新安院), 충주의 도통사(道統祠), 진주의 도통사(道通祠), 남해의 난곡사에서 향사하고 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묘소는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면 평리 양각산(羊角山)과 남해군 남면 우지막골에 있다.

 

치암 박충좌(1287-1349)

본관은 함양, 자는 자화(子華), 호는 치암(耻菴)이다. 치암 박충좌는 익재 이제현과 함께 백이정을 스승으로 모셨다. 박충좌는 우리나라에 관혼상제를 처음으로 도입하였다. 박충좌는 이제현과 함께 남해에서 스승을 모셨다. 그러던 어느날 스승의 몸에 병이 찾아왔다. 박충좌는 만사를 제쳐두고 약을 구하러 다녔지만 구하기 힘들었다. 그는 금산의 약초를 캐어 지극 정성으로 탕약을 끓여 아버지를 모시듯 스승을 모셨다. 사람들은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임금을 모시는 신하보다, 부모를 모시는 아들보다 더한 정성은 시골사람들을 감복시켰다. 박충좌는 지행합일(知行合一),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를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었다. 백이정이 입맛이 없어 식사를 거를 때는 자신도 밥을 먹지 않았다. 스승이 다시 식사를 할 때에야 밥숟갈을 잡았다.

박충좌는 이제현과 함께 성리학의 학문적 체계를 세웠다. 그의 학문은 이색, 정몽주, 권근, 정도전을 거쳐 정여창의 도학사상인 실천적 성리학의 뿌리가 됐다. 그는 재상이 돼서도 청빈함을 잃지 않고 오로지 학자의 길을 걸으며 제자를양성한 고려의 스승이었다.

 

익재 이제현(1287-1367)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역옹(櫟翁)이다.

1314년 상왕인 충선왕의 부름을 받아 원나라의 수도 연경으로 가서 만권당(萬卷堂)에 머물렀다. 충선왕은 왕위에서 물러난 다음에도 원나라에 있으면서 만권당을 짓고 서사(書史)를 즐겼다. 이때 원나라의 유명한 학자·문인들을 드나들게 했는데, 그들과 상대할 고려측의 인물로서 이제현을 지명했던 것이다. 충목왕이 즉위한 직후 판삼사사에 임명되어 문란해진 정치기강을 바로잡고 새로운 시책을 펴는 데 참여해 여러 항목에 걸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공민왕이 즉위해 새로운 개혁정치를 추진하려 할 때 정승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하였다. 1356년 기철(奇轍) 등을 죽이는 반원운동이 일어나자, 문하시중이 되어 사태의 수습에 나섰다가 다음해에 치사(致仕)하였다. 이색은 그의 묘지명에서 “도덕의 으뜸이요, 문학의 종장이다(道德之首 文章之宗).”라고 말한 바와 같이 후세에 커다란 추앙을 받았다.

 

난계 이희급(1553-1597)

남해군 이동면 난음리 출신으로 자는 중사(中思), 호는 난계(蘭溪), 본관은 장수이며 장천부원군 임간(林幹)의 후손으로 함양군수, 경남도사를 지냈다.

정유재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으며, 이충무공의 명량해전 때 벽파진전투에서 순국하여 선무공신 2등에 녹권되었다. 선무원종공신 녹권은 2018년 7월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637호로 지정됐다.

이희급은 삼군도체찰사로 일본대마도 정벌한 이종무 장군의 6대손이기도 하다. 이희급은 장수는 아니었지만 벽파진전투 이전부터 이순신 장군과 친숙했다. <난중일기>에 이희급의 아버지에 대한 극진한 관심을 기록한 것을 볼 때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지금의 난곡사 터는 옛날 난곡서원과 군자정이 있었던 자리다. 난계 이희급 선생이 이 서원에서 공부하여 문과에 급제한 남해 최초의 급제자로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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