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숙(남해문화원 사무국장·소설가)
김미숙(남해문화원 사무국장·소설가)

정암 조광조는 옥중에 있으며 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신은 망령되고 우직한 자질로 경연에 출입하며 감히 전하를 가까이 모실 수 있었습니다. 어리석게 속마음을 말씀 올려 뭇사람의 시기도 받았습니다. 신은 오로지 임금이 있는 것만 알고 다른 것을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신은 오로지 폐하를 요순같은 임금이 되게 하고자 마음을 다하였습니다. 폐하를 위한 것이 죄라면 신의 죄, 만 번 죽어도 마땅하나 옥사가 일어나면 걷잡을 수 없게 되어 죄 없는 선비들은 엄청난 피바람을 맞을 것입니다. 임금이 계신 곳이 멀어 감히 신의 생각을 아뢸 길이 없습니다. 신은 이대로 죽는 것이 참으로 견딜 수 없사옵니다. 전하. 친히 국문을 하시어 옳고 그름을 밝혀 주시면 소인 만 번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신의 뜻은 넘치나 전하께 아뢸 길이 없어 참으로 원통하옵니다.”
그는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충암과 자암이 그와 함께 죽으면 신진사류는 다시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정암은 이를 두고 볼 수 없었으며 자암과 충암을 반드시 살려야만 했다.
정광필은 정암이 실시한 현량과를 반대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들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영의정 정광필 뿐임을 정암은 잘 알고 있었다. 정암은 은밀히 정광필에게 자암과 충암을 꼭 살려 줄 것을 부탁하는 혈서를 써 보냈다. 정광필은 정암의 서신을 손에 들고 조용히 새벽을 맞이하고 있었다.
정암은 자암, 충암과 함께 경연을 준비했던 지난 세월이 행복했었다. 조정을 개혁하고 현량과를 만들어 인재가 두루 등용되는 것을 보고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나누었던 감동의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자암과 충암은 동지였으며 정암의 형제들이었다. 정암은 그들이 꼭 살아서 함께 꿈꾸었던 세상을 만들어 줄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마음의 짐을 그들에게 남기고 떠나는 것이 미안했다.

“자암, 충암, 미안허이…미안허이…”
영의정 정광필은 담담히 중종을 바라보며 아뢰었다.
“전하, 정암의 죄가 무엇이기에 투옥했습니까?”
“대신들이 조광조가 죄가 있다하기에 의금부에 가둔 것이다.”
중종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애써 감추며 궁색한 답변을 하였다.
“전하, 언제 대신들이 정암에게 죄가 있다고 했습니까?”
“훈구대신들이 조광조가 교만하기 때문에 죄가 있다 하였다.”
“전하, 유생들이 생각이 어리고 때를 몰라 저지른 잘못이니 선처를 바라옵고, 조광조가 이들을 선동하여 일으킨 일이옵니다. 이 모든 책임은 조광조에게 물으시고 자암 김구와 충암 김정은 유배로 그들의 죄를 묻길 간곡히 간언하옵니다.”

중종도 자암과 충암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을 사사하지 않으면 훈구파들이 들고 일어날 것임을 중종은 잘 알고 있었다. 영의정 정광필이 자신의 안위를 뒤로 하고 젊은 인재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을 중종은 알고 있었다. 
중종은 신진사류와 훈구파를 떠나 뛰어난 충신 조광조를 잃었지만 한 명의 노련한 충신을 얻은 것 같아 내심 흐뭇했다. 그는 그런 마음을 숨기고 자암과 충암을 살려줄 것을 선처한 정광필을 영중추부사로 좌천시키고, 자암과 충암을 유배 보냄으로서 훈구파들의 원성을 잠재웠다.

중종은 떠나는 정광필의 손을 꼭 잡으며 다시 부를 것을 약속했다. 중종은 주초위왕 사건을 의도적으로 일으켰지만 젊고 유능한 인재들을 아무런 이유 없이 죽일 수는 없었다. 급진적 이상주의를 펼쳤던 신진사류 조광조를 능주에 귀양 보내 사사하고,  김구, 김정을 남해와 제주도로 유배 보내는 것으로 사화를 마무리 지었다. 
유생들의 통곡소리가 귓전에 들렸다. 정암의 억울한 죽음에 수 많은 유생들은 상소를 올렸다가 감옥에 갇혔다. 수백 명의 사림파들은 의금부에 체포되어 가혹한 문초를 받았다. 
김정과 함께 장 1백에 처해진 뒤 유배지로 떠나는 자암은 구차한 목숨에 연연해하는 자신이 비겁해 보였다. 그리고 훗날을 기약하기엔 중종이 신진사류에게 준 상처가 너무나 컸다.
모두가 떠나고 없는 도성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어쩌면 떠나는 편이 홀가분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섬겼었던 임금은 왕도정치로 조선을 바로 세우길 바랐으며, 개혁에 앞장섰던 지혜로운 왕이었다. 
자암이 경연을 준비하기 위해 옥당에서 책을 읽고 있을 때 임금께서 직접 술을 들고 납시어 함께 술을 권하며 마셨었다. 하지만 지금의 임금은 훈구파들의 어처구니없는 모함에 동조하고 있었다. 진정한 충신들을 지켜주지 못하고 그들과 함께 등에 칼을 꽂았던 것이다. 이는 어버이에게 버림받는 것보다 더 큰 상처가 되어 자암의 가슴에 사무쳤다. 자암은 웃다가 울었다. 다시 울다가 웃으니, 마치 실성한 사람과 같았다. 멀어져가는 도성을 바라보고 그렇게 한양을 떠나왔다.
남쪽 끝자락 남해다.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이곳에서 꽃비만이 자암을 반기며 도포자락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섬들이 눈에 들어왔다. 올망졸망한 자그마한 섬들이 마치 자암을 반기듯 어깨를 나란히 하며 웃고 있었다. 
자암은 자신의 무기력한 눈을 의심하고, 다시 눈을 부비며 천천히 훑어보았다. 화사한 꽃들이 섬에 가득했다. 인간에게 배신당하고 지친 자신의 영혼을 품어주는 듯한 신묘한 섬이라 생각했다. 동정호 위에 떠 있는 섬 군산(君山)의 죽림처럼 자암은 남해의 죽림에 집을 짓고 신선이 되어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암이 바라 본 남해는 아름다운 섬이었다. 영산(靈山) 망운산의 산세는 남성적인 기백이 넘쳤으며 신비로웠다. 낭창거리는 여인의 허리를 감아도는 듯한 해안선은 사내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참으로 절묘한 조화로구나’라고 자암은 생각했다.
자암은 흥얼거리며 해송과 대나무 숲이 멋스런 노량 포구의 주막을 찾았다.
‘술을 마시자니 구름 낀 하늘도 저물고, 뜬 구름 인생은 바닷가 마을에 머물게 되었구나. 술아! 세상이 나를 버렸고, 나도 세상을 버렸는데 너는 나를 버리지 않았구나. 너와 내가 서로의 맘을 알고, 너는 나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네가 나랏님보다 낫구나! 한양의 번화함보다 자연의 풍요로움이 나의 마음을 더 편하게 하는구나!’
자암은 주모에게 큰 사발을 달라하여 술병에 있는 술을 모두 잔에 붓고 목구멍이 찢어져라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입가에 흘러내리는 술을 손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닦아냈다. 자암은 안주 대신 초점 없는 눈으로 남쪽 끝자락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넘실거리는 바다는 검붉은 노을을 삼키고 있었다. 시커먼 하늘은 고승이 사리를 뽑아내듯 작은 보석들을 하나씩 토해 내고 있었다. 
자암의 술잔에 담긴 고운 사리 하나가 아리도록 예뻤지만 자암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술 뿐이었다. 남해 유배지에서의 하루는 이렇게 저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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