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숙(남해문화원 사무국장·소설가)
김미숙(남해문화원 사무국장·소설가)

 

아름다운 자연 뒤에 숨어있는 남해의 척박한 땅에서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여인들의 모진 삶이 연이 어머니는 두려웠다. 외로운 원한이 새벽을 덮친 듯한 어둠 속에서도 밭일과 논일을 해야 했고, 서러움이 눈물이 되어 떨어지는 밤에도 그녀의 일상은 끝나지 않았다. 늦은 저녁 미천하게 내동댕이친 육신이 서러울 법한데 실낱같은 희망의 끈이 가뭄의 뙤약볕처럼머리를 미친 듯 비추니 그녀의 육신과 영혼은 서서히 말라가고 있었다. 허약해진 몸은 풍토병으로 더욱 쇠약해졌으며 마음의 병도 깊어만 갔다. 
모천 댁은 많은 유배객들이 풍토병으로 고생하다 죽는 것을 종종 보아왔었다. 연약한 한양댁이 풍토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고 있음을 안 모천 댁은 그녀의 몫까지 묵묵히 일했다. 하지만 그녀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한 겨울의 날카로운 해풍은 살을 에는 듯 했다. 방문 사이로 들어오는 칼바람은 얼굴과 코끝을 시리게 했다. 인정 많은 모천 댁이 아궁이에 불을 지폈는지 방바닥은 따스했다. 연이 어머니는 가늘게 붙어있는 생명의 끈을 붙잡으며 말했다.
“연이야, 너의 아비도 너도 지키지 못하는 못난 에미가 되었구나. 어미는 너와 너의 아비를 지키지 못했지만 너는 자신을 꼭 지켜야 한다”연이 어머니는 머리에 꽂힌 옥비녀를 힘겹게 연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 비녀는 너의 할머니께서 주신 것이다. 에미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이것 밖에 없구나. 이 비녀는 너의 아버지와 함께 한 날 한 몸이 되었던 것이니, 어미와 아비는 항상 너와 같이 있을 것이다.”
“연이야 춥구나. 이 에미를 안아주지 않으련.”
연이는 정신을 잃어가는 어머니의 얼굴을 부비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연이는 어머니의 체온을 붙잡으며 세상에 혼자된다는 불안감을 잊으려 발버둥치고 있었다. 연이 어머니는 연이를 안은 채 차마 눈을 감지 못하고 싸늘히 식어갔다.
“한양 댁, 이녘(당신)이 만든 동치미가 억쑤로 맛있는데…바래일도 힘들면 내가 할끼고, 밭일도 내가 다 할 낀데…”
모천 댁은 사글사글한 동치미 한 그릇을 들고 울며 서 있었다. 정이 고팠던 모천 댁은 연이 어머니가 좋았다. 그녀는 애비가 누군지도 모르는 아들을 예뻐해 주는 그녀가 고마웠다. 한양 댁의 곱고 하얀 얼굴이 예뻤다. 사람대접 받는 것 같아 모천 댁은 좋았다.

또 하나의 이별~

대유는 머리의 부스럼 때문에 오늘도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며칠을 방에서 꼼짝하지 않고 책만 읽고 있는 아들이 어머니는 걱정스러웠다.
“예산 댁 부스럼 난 머리를 삭발해야 하니 차비를 하고 알리게.”
대유의 어머니는 예산 댁을 불러 이르고 대유의 방으로 들어갔다. 대유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어머니께 예를 갖추었다.
“어머니! 신체발부 수지부모 (身體髮膚 受之父母)라 하였습니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몸을 소중히 다루지 못하고 어버이께 걱정을 끼쳐드리는 불효를 저질렀습니다. 저의 불효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6살 난 아들의 생각이 대견했다. 하지만 너무 일찍 철이 든 것 같아 대유 어머니의 마음이 애잔해 왔다.
“대유야, 마음고생이 심하구나. 방에만 있지 말고 바깥바람도 쐬도록 하여라. 애미는 네 몸이 상할까 걱정이구나.”
안쓰러운 마음에 살갑게 안아주고 대유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대유는 어머니 몰래 예산 댁을 불렀다. “예산 댁, 삭발한 모습을 부모님께서 보시면 마음 아파하실 것이니 머리에 쓸 것을 미리 준비해 두게.”
대유의 어머니는 예산 댁에게서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부모를 먼저 생각하는 아들의 맘이 고맙고 기특했다. 대유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아들이었다. 대유는 삭발을 하고 예산 댁이 준비한 두건을 쓰고 석류나무 옆에 앉았다.

보물을 아끼면서 몸을 아낄 줄 몰랐다니
중국 상인들의 어리석음이 가소롭구나.
어쩌다가 스스로를 아끼지 못하여
몸을 갈라 밝은 진주를 숨겼단 말인가? 

6살 대유가 석류나무 아래서 읊은 시를 듣고 있던 하인들과 아버지는 대유의 문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유(자암)는 예조판서 김예몽의 증손자이며 대흥현감 김계문의 아들이다. 어렸을 때부터 영특함이 남달랐다. 
자암은 한양 연희방 명문집안 출신으로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이 귀히 자랐다. 자암은 16세에 한성시 장원, 20세에 생원시와 진사시를 동시에 장원했다. 사려 깊고 총명한 자암은 젊은 나이에 인수체라는 필법으로 그 명성을 날렸다. 자암은 천운을 타고 난 아이처럼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루었다. 일찍이 과거에 오른 자암은 32세에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다.
진취적이고 호방한 성품을 가진 자암은 신진사류인 조광조와 함께 이상 정치 실현을 꿈꾸었다. 자암에게는 꿈같은 시간들이었다. 정암 조광조는 현량과를 설치해 인재를 두루 등용하고 성리학에 의한 철인군주 정치를 내세우며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그 주축에 자암이 함께 하고 있었다.
신진사류들은 중종반정 공신들 중 76명은 뚜렷한 공도 없이 공훈을 받았으니 삭제해야 한다는 공론을 만들어 위훈삭제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훈구파들을 자극하게 되었고 기묘사화의 원인을 제공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신진사류와 훈구파와의 골은 깊어만 갔다. 실권을 장악한 신진사류에 반발한 훈구파는 중종의 후궁인 홍경주의 딸을 치적으로 이용하였다. 홍경주의 딸 희빈 홍씨는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자를 궁중 동산의 나뭇잎에 꿀을 묻힌 후 벌레가 갉아먹게 했다. 그리고 희빈 홍씨는 중종에게 조씨가 왕이 되려 한다고 거짓으로 고하였다.
중종은, 왕의 수양을 요구하는 철인군주론이 그의 목줄을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그는 경연때마다 머리가 찌근거리고 아팠다.
“전하 힘으로 다스리는 패도정치가 아닌 덕정을 하셔야 이 나라가 바로설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진정한 왕도정치를 실현하셔야 합니다.”
성리학의 정치이론으로 신진사류들은 쉼 없이 간언하며 소리를 높여갔다. 
그리고 젊은 성리학자들은 끊임없이 개혁을 요구했다. 중종은 그들의 급진적 개혁에 서서히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로 중종은 신진사류가 눈에 가시인 훈구파와 함께 젊은 사대부를 축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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