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 종 욱(진주교대 교수)
임 종 욱(진주교대 교수)

빛을 이용해 사물의 무늬를 재현한 최초의 사람은 묵자라고 한다. 평화주의자였던 그는 암실에 작은 구멍을 뚫어 빛이 들어오게 함으로써 바깥 세계의 형상을 암실 안에 맺히게 했다는 것이다. 빛의 생리를 누구보다 먼저 간파한 묵자는 인류 최초의 빛의 연금술사라 할 만하다.
묵자의 지혜를 계승한 중국인들은 일찍부터 빛이 비치면 그림자가 생긴다는 이치를 예술로 승화시켰다. 피영(皮影)이라 불리는 중국식 그림자 연극은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사랑을 받아왔다. 피영은 채색 그림자까지 창안해냈다. 동물 가죽에서 털과 지방을 없앤 뒤 햇볕에 말리면 가죽이 투명하게 변한다고 한다. 이 가죽으로 형상을 오려내 채색하고 불에 비추면 천연색 광채를 띠게 된다. 중국의 피영은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에 등재될 만큼 긴 역사와 정교함을 자랑한다.그런데 그림자 연극의 유구한 전통은 중국인들만의 유산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만석중놀이’라고 불리는 그림자 연극이 고려시대 때부터 공연되었다. 주로 사월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에 연등불(燃燈佛)연희로 공연되었는데, 이것이 만석중놀이의 원형이라고 한다.
목각 인형과 사슴, 노루, 용과 잉어 등을 등장시켜 인간 세상의 탐욕을 풍자하고 해탈의 삶을 노래한 이 그림자 연극은 식민지 시대 때 잠시 명맥이 끊겼지만, 참다운 민속학자 심우성 선생과 뜻있는 분들의 고증과 노력으로 다시 우리들 눈앞에 펼쳐지게 되었다.이번에 남해국제탈공연예술촌에서 탈의 생명력을 생생하게 구현하는 한편 만석중놀이의 연희 현장을 보여주는 뜻 깊은 행사를 마련했다고 한다. 만석중놀이 그림자 연극은 중국의 피영과는 달리 그림자가 비치는 장막의 폭이 넓은 데다 철학적 사유까지 갖추고 있다. 단순히 보고 즐기는 수준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겸허하게 되돌아보게 만드는 명상과 치유의 장으로 상승한 예술인 셈이다.
그림자는 어둡지만 그것을 만드는 배경에는 밝고 따뜻한 빛이 있다. 때문에 빛을 머금은 그림자는 차가운 어둠이 아니라 따뜻한 온기를 지녔다. 그 온기로 가득 찬 그림자의 향연에 다들 동참해 우리 선조의 높고 깊은 예술적 지혜와 사유 세계를 만끽하시기를 권한다. 이 빛과 어둠의 축제를 마련하느라 애쓴 촌장 권혁기 선생과 관계자 여러분들께도 심심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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