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철명상디자인학교 교장
박 철명상디자인학교 교장

모든 것이 마음의 소산 아님이 없습니다. 가고 오는 것, 채우고 비워내는 일상의 모든 일이 다 그렇습니다. 의도가 모든 행위의 시작이듯이 마음은 내가 정하고 동하는 이치에 따라 육신과 정신을 조율하며 세계와 소통합니다. 비록 형체와 색깔도 없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입자이지만 그가 관여하고 있는 영역은 무한대여서 우주를 섭렵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마음의 무게 중심이 얼마인지 저울에 달아도 단 한 치의 양도 나올 것 같지 않지만, 그가 가진 역량은 모든 것에 관여치 않음이 없고, 행사하지 않음이 없을 정도로 광범위합니다. 이러한 마음은 그 넓기가 한량이 없으나 선택의 영역에서 아주 미세한 자극에도 반응하는 양면성을 띠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지나침을 다스릴 방편에서 중도를 유지해야 하는 것도 마음이란 어느 쪽이든 작정한 대로 빠르게 흡수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내 마음 내 것이기에 내 하고 싶은 대로 한다’라는 자조적인 동기가 마음 밝히는 여정에서는 커다란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이를 일러 데이비드 호킨스는 자신이 내보낸 모든 생각이나 말, 행위에 대한 책임을 수용해야 하며 우리의 결정은 의식이 우주 전체에 파문을 일으켜 모두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현자의 진언(眞言)이 아니더라도 마음 씀의 용도에 따라 세상의 질서가 달라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심지어는 우주질서(기상이변, 오존층의 훼손)마저도 재편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란 개인의 사유나 소유가 아니라 전체를 살리는 공유의 의미로 귀결되는 것이 마음을 쓰는 용도로 합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귀결점에도 불구하고 본래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순수한 마음의 사조(思潮)를 어떻게 가져가야 하는지조차도 갸름하기 힘든 시대에 사는 것은 그만큼 시대가 빠름으로 치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너무 빠르게 전개되는 산업구조의 특성상 마음의 본질이나 특성을 살필 여유가 없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내 마음 나도 몰라,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라는 신조어처럼 내 마음의 속성은 무엇이며, 변화무쌍한 이 마음이 진짜 나인지 식별하기조차 어려운 시대에 사는 것입니다. 

결과론적으로 마음이 빨라지고 있는 현상은 이와 연관된 일체 생명을 더 빨리 더 신속하게 절단 또는 훼손케 함으로써 성과를 신속히 이루려는 욕망을 양산케 합니다. 이는 자연히 신속, 편리를 담보할 일회용품의 증가로 이어지고 이 목표를 달성하려면 천연의 자연이 더 많이 더 빠르게 훼손되는 상황이 반복되어 집니다. 다시 말하면 우연히 먹은 마음이라도 내가 빠르게 결과를 내어야겠다고 다짐하는 순간 어느 곳에 있든 자연환경이 급속히 절단, 훼손되어 진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무가 얼마나 많이 잘려나가는지 또는 일회성 용품의 폐해조차도 내 마음 쓰기에 따른 결과라면 마음 쓰는 것도 공과 사로서 엄정히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다 요즈음은 일회용 플라스틱 빨대의 유해성이라든지 분해된 작은 알맹이가 생명에 미치는 영향마저도 마음작용이나 심리의 영향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더욱 경각심을 가져야 할 부분입니다. (일회용품 -종이컵, 두루마리 휴지, 비닐봉지의 대안으로 마음으로 담아낼 개인용품 -개인 컵, 손수건, 시장바구니를 사용함으로써 서로의 생명을 살리고 살게 해주는 용이한 마음 씀이 요구되기도 합니다) 결국 절단, 왜곡, 파괴, 분출의 이면에는 우리의 마음이 황폐해진(빠름에 속절없이 무너져 양산된 허무감, 고독감, 소외감, 공허함, 불만족, 분노 등에 따른 스트레스) 것의 투사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마음으로 화(和)하여 생명의 본질을 살릴 차원에서 마음 길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전, 후세대를 통털어 가장 시급히 이행해야 할 화두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의 마음은 전체 생명의 정기(精氣)와 공유하면서 살과 뼈와 피가 되어 같이 숨 쉬고 살아가는 큰 나 -한마음이기에 더욱더 그렇습니다. 우리가 명상이나 묵상을 통하여 생명 본연의 자리에 안착할 용기를 지녀야 하는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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