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표성‧류봉화 부부의 이웃집에 살고 있는 어느 할머니로부터 강표성 할아버지의 선행을 알리는 제보 전화가 걸려왔다. “96세인 고령의 할아버지가 아주 오래 전부터 주변시설과 길거리청소와 풀 베는 일을 계속 해오고 있다”며 만나보라고 했다. 빨리 뵙고 싶어 댁으로 전화를 드렸지만 청력을 상실한 할아버지는 전화 울림을 듣지 못해 결국 통화를 할 수 없었다. 며칠 후 다행히 할머니 휴대폰으로 전화연결이 되어 댁으로 찾아가게 되었다.

노부부가 살고 있는 집 현관입구에는 며칠 전 텃밭에서 거둬들인 다양한 콩과 상추씨 등이 채반 위에 놓인 채 오후의 햇살을 받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낯선 필자를 보고 처음에는 살짝 놀란 듯했지만 바로 평온한 모습을 되찾고 한자리에 조용히 계셨다. 할머니는 지나온 세월을 전하는 중에 할아버지를 한 번씩 쳐다보며 처음부터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 모습은 그동안 할아버지와 별 부딪힘 없이 무난하게 잘 살아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고, 지금 주어진 일에도 만족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으로 보였다. 

현재 91세인 할머니는 설천면 모천마을에서 태어나 그 당시 진목초등학교를 졸업했기에 한글도 잘 읽고 계산도 잘했다. 할아버지의 선행을 알아보기 위한 방문이었지만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할머니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들이 더 풍성했다. 그녀는 30대 후반부터 마을을 위한 ‘반장’ 일을 시작하여 현재 50년을 훌쩍 넘기고 있다. 남해읍 유림2리 이곳에 시집온 후 집의 모습도 두 번이나 바뀌었다. 초가집이 슬레이트지붕으로, 슬레이트지붕은 다시 양옥집으로 건축되었고 몇 해 전 리모델링을 한 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새로 지은 집에서 조금만 살다 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 좋은 집에서 33년째 살고 있다고 활짝 웃으셨다. 

할머니를 통해 듣는 그 옛날 반장일은 한 시대의 역사를 다양한 측면에서 유추하게 했다. 그때 반장들은 집집마다 월 회비를 1000원 1500원 2000원 계속 인상하여 받았으며, 집에 경조사가 있을 때마다 리어카에 식기류를 싣고 운반하여 편하게 사용하도록 했다. 사용 후에는 다시 싣고 와 깨끗이 보관하는 일을 반복했다. 마을을 위해 수고하는 반장에게 감사함을 표하기 위해 면에서는 일 년에 딱 한 번 고무신 한 켤레씩을 선물했다. 마을 경조사를 챙기고 회비를 거두고 수도‧전기요금 납부고지서를 각 가정에 전달한 후 받는 고무신 한 켤레는 지금 생각하면 별 게 아니지만 그 당시는 정말 달콤한 대가였다. 

경조사가 끝난 후에는 수저를 열 벌씩 묶어 개수를 정확하게 파악하였고 식기류를 하나도 깨뜨리는 일없이 잘 전달하여, 마을 이장은 언제나 할머니가 정리해서 가져오는 물품들은 검사를 안 해도 된다며 신뢰를 했다. 마을에서 받는 월회비도 모두 열흘 만에 받아 8개 반 중에 일등으로 이장에게 전달하는 모범반장이다보니 이장은 할머니에게 제일 많은 점수를 주고 계속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무슨 일이든 맡은 일을 똑 부러지게 잘하는 할머니는 많은 농사를 지으면서도 반장 일을 항상 소홀히 하지 않았다. 4남2녀를 둔 할머니는 바쁜 철에는 아이들에게 수도 전기요금 고지서를 집집마다 전달하게 하면서 바람에 날려갈까 봐 무거운 걸레나 주변에 있는 물건으로 꼭 눌러두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할머니는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반장 일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 일 년에 두 번만 회비를 받기에 그것만 해도 편해졌고, 고지서 심부름도 없으니 너무나 편해졌다고 했다. 요즘은 결혼식도 식장에서, 초상이 나도 병원에서 대행하니 리어카에 그릇을 싣고 가는 일도 없어 그것도 좋아졌다고 한다. “사실 내가 반장을 안 하고 다른 사람이 맡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할머니가 대신 해주면 안 되냐는 부탁을 하여 6개월 씩 돌아가면서 하자고 했던 반장 일을 다시 하다 보니 장기적으로 하게 되었다. 내가 집집마다 회비를 받으러 갔는데 집에 없었을 때는 직접 갖다 주기도 하여 고마웠다”라며 그 당시의 얼굴들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릇을 리어카에 싣고 힘든 길을 오를 때마다 할아버지는 앞에서 끌고 할머니는 뒤에서 밀곤 했다. 그러니까 반장 명의는 강표성 할아버지 앞으로 돼 있고 일은 류봉화 할머니가 거의 다한 것이다. 그래서 할머니는 그 옛날 남해군수와 경남도지사로부터 봉사상을 받기도 했다. 마을 일이 생길 때마다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반장 일을 잘 해내어 그런 상을 받은 것이다. 현재 37가구 주민들의 명단을 다 외우고 그동안 거쳐 간 마을이장 12명의 이름도 다 외우고 있는 그녀는 이번에 다른 사람에게 반장 일을 맡기려고 했지만 현 이장이 자기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수고를 해 달라 하여 내년까지 반장 일을 해야 한다. 

일복이 많은 할머니는 3년 전 유림2동에 생긴 새 경로당의 청소 일도 맡아오고 있다. 그곳에서 주민들과 밥도 해먹고 강의 장소로도 자주 사용하기에 매일 깨끗이 쓸고 닦는다. 주민들은 경로당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는데 자주 발걸음 하는 이웃들은 94세 할머니 92세 할머니 2명 91세 할머니 그 외 80대 할머니들이다. 이곳에 모여 TV연속극 이야기도 하고 건강이야기도 하고 웃음치료사가 오면 함께 웃기도 하고 다른 수업도 즐겁게 받으면서 노후를 건강하게 보내고 있다. 

더러운 것을 보지 못하는 할아버지는 새벽5시면 기상을 하여 주변을 돌면서 담배꽁초도 줍고 쓰레기도 줍고 풀도 벤다. 그 일을 한 것이 벌써 10여 년 전이니 상당히 오랫동안 묵묵히 주변을 청소하며 마을에 봉사를 한 것이다. 할아버지는 집안에 쓰레기도 치우고 청소도 잘한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향교 아래 팔각정, 놀이터 등을 깨끗이 관리한다. 할머니와 함께 텃밭에서 농작물을 수확하는 재미로 사시는 할아버지는 심어놓은 고구마가 걱정되어 어제는 물을 듬뿍 주기도 했다. 언제나 가만히 있지 못하고 할 일을 찾아 하는 할아버지는, 빨랫줄에 걸려 있던 할머니 옷을 거둬오기도 했다.  

27년 전부터 큰아들부부와 살면서 언제나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는 할머니는 기어코 한 마디를 하신다. “요즘 자식부부와 사는 가정이 거의 없기에 항상 큰아들부부를 크게 생각한다. 매일 조석을 차려주고 집안일을 해주고 건강도 챙겨주는 며느리를 나는 효부라고 생각한다. 남해에서 며느리를 3명 봤는데 모두 좋은 사람들이다. 내가 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고도 했다. 자식들이 모두 잘하고 있어 더없이 행복하다는 할머니는 굽은 허리로 또 경로당으로 향한다. 저녁6시면 문단속을 한다는 할머니께 언제까지 반장 일을 하실 것인지를 물으니, “할 사람 있을 때까지”라고 한다. 혹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냐는 질문에 는 “한 명도 없다”는 명쾌한 답이 돌아왔다. 할머니의 순수함에 이끌린 필자는 “류봉화 반장님은 유림2리 1반의 영원한 반장님입니다”라는 말이 봉선화 씨앗 터지듯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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