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철명상디자인학교 교장
박 철명상디자인학교 교장

6월 초 부드러운 햇살이 비치던 공원 벤치에는 대낮인데도 휴식을 즐기는 사람이 꽤 있었습니다. 마침 나무 아래 비어있는 벤치가 있어 몸을 의지한 체 깊은 묵상에 잠깁니다. 따스한 자연 감광(感光), 녹색 채광으로 엮어진 나뭇잎 입자의 율동, 공원 주변의 아름드리 꽃의 향기는 심신을 이완시켜주기에 충분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자연한 기운에 도취해 고요에 젖어 든 순간 분위기를 깨는 소란스러움에 눈을 뜨고 말았습니다. 필자가 앉은 맞은편 벤치에서 자매인 듯 두 사람이 큰 소리로 떠들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은 어떤 일로 인하여 감정이 일어났을 것이고 그러한 감정에 분노가 뒤섞였을 것이라 짐작하였습니다. 과연 그들의 대화 내용은 거의 상대에 대한 험담과 비판 일색이었습니다. 신랑이 애를 먹이는 이야기, 말 안 듣는 아이 이야기, 시부모 이야기, 어떻게 살아야 할지 걱정스러운 이야기 등 이었습니다. 그저 일상에서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로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나 하려는 듯 극단적인 욕설과 육두문자까지 써가며 분노를 여지없이 폭발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서운한 감정을 여과 없이 터뜨리는 듯하였습니다. 하지만 조금은 수다스럽게 펼쳐지는 이들의 대화도 시간이 지날수록 그 기류가 변화되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잘못의 원인을 온통 상대방에게 투사하던 것으로부터 어느덧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는 측은지심으로 옮겨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어찌 보면 우리 신랑의 입장도 이해할 만해, 그이는 얼마나 갑갑할까? 말은 안 해도 경기 전망이 안 좋은 데 아마 속이 터질 거야? 시부모도 연세가 있으시니? 농사일로 힘든 거는 마찬가지고, 아이들도 요즘 과외다 뭐다 해서 쉴 틈을 주니 않으니, 그런 걸 알면서도 공부하라 소리 지르기만 해서 조금은 미안하기도 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대화 분위기는 상대를 향하여 연민으로 이어지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품격 있는 대화란 모름지기 상대의 입장을 잘 헤아려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켜 지혜를 현실에 반영하는 것이라는 것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한참 동안 전개되던 대화에 동화되어 갈 무렵 그들의 이야기는 어느덧 자신의 내면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니야 생각해보니 신랑, 아이, 시부모의 기분이 좋고 나빠지는 게 다 내 하기에 달린 것 같아.” “그래 너 그렇게 생각하니.” “너도 철이 들었네.” 오랜 시간 동안 나눈 그들의 대화는 처음에는 분노 표출로 시작되어 나중에는 상대를 이해하는 입장으로 선회하였고 말미에는 모든 것이 내 탓이라는 자아 성찰로 마음을 이끌었던 것입니다.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을 스스로 변화시켜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켜 깨어남의 진수를 보여준 멋진 대화였습니다. 

사람은 대개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행위 자체에 어떤 잘못이 있더라도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스스로 용인하거나 묵인하며 관용적이기까지 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아무리 가까운 사이일지라도 상대방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보편타당한 근거에 의거 명확히 잘잘못을 따져 구분하려 듭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아무리 비난 일색의 감정이 일어도 객관적으로 사실을 재인식함으로써 한 차원 높은 의식으로 관점을 새롭게 가질 수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새롭게 본다는 것은 대화에 있어 감정의 기운을 넘어 감정과 감정 사이 단 1%의 틈새를 확장하는 능력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행적 경험을 포용하고 수용하면서 객관적 대안을 새로이 제시하는 형태입니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라 이를 적절히 다스린다는 것이 힘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기 전에 내 허물을 먼저 생각하며 지혜를 공유하는 일은 품격 있는 사람으로서 지켜내야 할 과제임이 분명합니다. 그런 점에서 공원에서 만난 자매의 격조 높은 대화는 의미 있는 교훈으로 필자의 감성을 자극하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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