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書籍)을 불사르고 유생들을 산 채로 묻어 죽임’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발본색원을 하거나 폭정을 저지르는 것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분서갱유’라 하며, 분서와 갱유를 병칭(竝稱)하고 있지만, 사실은 갱유는 분서와는 별개의 사건으로, 도가(道家)의 방사(方士)들이 일으킨 화(禍)로 인해 그 불똥이 유생들에게 튄 사건이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제는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郡縣)제를 채택는데, 군현제를 시행한 지 8년이 되던 날, 진나라 초석(礎石)을 놓은 박사(博士) 승상(丞相)인 순우월(淳于越제)이 현행 제도하에서는 황실의 무궁한 안녕을 기약하기 어렵다며 봉건제로 돌아갈 것을 진언한다. 
이에 시황제가 신하들에게 그 의견에 대한 가부(可否)를 묻자 개국공신이며 군현제의 입안자인 승상(丞相) 이사(李斯)가 말한다.
“봉건시대에는 제후(諸侯)들 간에 전쟁이 끊이질 않아 천하가 어지러웠으나 이제는 평정(平定)되어 사회의 안정을 찾았으니,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의약(醫藥), 복서(卜書), 농업에 관한 책과 진나라 역사서는 남겨 두되, 만약 법령을 배우고자 하면 관리를 스승으로 삼게 하고, 진나라 역사서 외에는 모두 불태워 없애 버리소서”... 
이에 시황제는 이사의 말 그대로 책들이 모두 불태워졌는데, 당시에는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이라 대나무로 만든 죽간(竹簡)에 쓰여 있어, 복원할 수 없이 사라진 희귀한 책들이 많았다. 이것을 분서라고 한다. 
진시황은 말년에 미신에 빠져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선약(仙藥)을 구해 주겠다는 도가의 방사들에게 사기를 많이 당했다고 한다.
서복(徐福:서불徐市)이나 한중(韓衆)과 같은 방사(方士)들은 돈만 사취(詐取)하고, 진시황의 부덕함을 비난하며 도망을 쳐 버렸다.
이에 화가 난 진시황은 자신의 실정을 비난하고 다니던 함양(咸陽:진나라수도)의 서생 460여명을 산 채로 구덩이에 생매장해 버렸는데, 이것을 갱유라고 한다.
‘분서갱유’는 중국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와 사기(史記) 유림열전(儒林列傳)에 나온다. 후세 사람들이 진시황이 사서(史書)를 불태우고 서생(書生)들을 갱살(坑殺)한 사건을 ‘분서갱유’라 칭하며, 당시에 유학자(儒學者)들을 산 채로 죽였다고 한 것은, 처음으로 공안국(孔安國)의 상서(上書) 서(序)에 기인했다고 한다.
진시황이 선대(先代)의 전적(前績)을 없애고, 서적을 불사르고 유학자들을 산 채로 묻어 버리자 천하의 학사들이 모두 난을 피해 흩어져 버렸다. 역사상 유래가 없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시황제는 늙지 않는다는 불로초(不老草)를 구하려고 시종(侍從)인 서복(서불)을 남해금산(南海錦山) 등에 보내 샅샅이 뒤졌으나 어디 불로초가 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금산 정상 가는 길 중간지점에 있는 서불과차(徐市過此:서불이이곳을지나다?) 암각화(巖刻畵)는 상형문자인지 그림인지 알 수 없는 형태로 바위에 새겨져 있다.
시황제는 정치적인 비판을 막기 위해 자신과 뜻이 다른 사상을 가진 자는 무참히 밟아 버렸다. 
 이른바 과거 대부분의 독재정권들은 언론을 장악하고, 언론인을 통제하기 위해, 보도지침을 만들어 현대판 ‘분서갱유’를 기도하기도 했던 암울한 시대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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